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25일 오후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25일 대구에서 두번째 기자회견을 갖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 전신)는 정신대를 위한 기관인데 무슨 권리로 위안부 피해자를 이용하냐"며 화두를 던졌다.
이 할머니는 "비유하자면 만두 겉면은 정신대로 빚어놓고 속에는 위안부를 넣었다"라며 "일본에 '사죄해라' '배상해라' 주장해도 일본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지, 섞어서 이건 사죄 안해도 된다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이 할머니는 "공장에 갔다온 정신대와 위안부는 많이 다르다. 14살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끌려가서 당한 일은 말로도 못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일본군의 대만 주둔 가미가제 특공대의 강제 동원 '위안부' 피해자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할머니의 주장처럼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용해 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진 것인지는 좀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개념이 다른 두 용어가 섞여서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정신대는 이름 그대로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뜻인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1940년대 남녀 각 조직에 정신대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했다. 정신대가 일반화된 것은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이 제정되면서부터였다.
여자근로정신대는 남성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수십만 명에 달하는 미혼여성을 일본과 국내의 군수공장 등에 강제 취역시킨 것이다. 일종의 강제 노역인 셈이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인 심용환씨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정신대 근로령으로 동원된 이들 중에는 상당수가 노무 동원인 경우가 많다. 즉,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성노예가 아닌 경우가 많다는 말"이라고 밝혔다.
위안부는 1932년 상하이 일본 해군의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본격적으로 동원된 것은 1938년 중일전쟁과 국가총동원령 이후로 알려졌다.
군대의 사기, 강간 방지 등의 제국주의적 미명 아래 군부대나 주요 이동 경로에 위안소를 설치했고, 한국 뿐아니라 타이완 등 동남아 지역의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원칙적으로는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는 이렇게 다른 개념이지만 상당히 오랜시간 동안 '정신대=위안부'로 인식돼왔다.
정신대와 위안부가 비슷한 의미로 쓰인 것은 당시 여성이 일제에게 끌려간다는 것은 곧 순결을 잃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신대로 끌려 간 여성 중에 위안부가 되기도 했다는 증언과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