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원에게 접힌 신문지로 옆 엉덩이를 때리며 '인사 좀 하지. 결혼 했으면 직장 예절은 알고 있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은 성희롱일까요? 성희롱이 아닙니다."
25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이 기관은 최근까지 이같은 내용이 담긴 '4대 폭력 예방교육(성희롱, 성폭력, 성매매, 가정폭력)' 프로그램을 직원들에게 시청시켰다. 동영상 콘텐츠인 해당 프로그램은 몇몇 공공기관에서 전 직원이 이수해야 하는 법정의무 교육 콘텐츠로 활용했다.
콘텐츠 제작은 민간기업체 H사를 통해 유통됐다. 각종 온·오프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이 업체는 공기업과 대기업 등 1만5천여 기관과 협업하고 있다고 홍보한다.
성희롱이 아닌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재판부는 인사를 하지 않아 지적하는 것은 성희롱에 대한 고의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며,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준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는 것이다.
다만 언제, 누구의 판례를 인용하고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상세한 맥락 제시 없이 판결만 단순히 전달하면서 "성희롱이 아니다"라고 단정한다면, 피교육자들에게 왜곡된 정보만 주입하게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성희롱의 범위와 개념이 포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사회상을 감안해도 교육 내용의 적절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 장윤미 변호사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판결문의 전후 맥락을 다 배제한 채 하나의 상징적인 사례처럼 '성희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며 "심지어 법원의 판단이 설사 그런 취지라고 한다면, 그 판결을 비판적으로 봐야지 그걸 옹호하는 입장은 더욱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사진=안나경 기자)
황당한 교육 내용은 더 있다.
"총무과장 A가 퇴근시간 회사 내 주차장 부근에서 우연히 총무과 직원 B를 만나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동승했다. 이때 A가 B에게 '승용차 뒤 트렁크에 포르노비디오 테이프가 있고 비디오 방을 여관처럼 개조하여 침대까지 비치해 놓은 곳이 있으니 거기 가서 같이 보자'고 말한 것은 성희롱이 아닙니다. 재판부는 직장 내의 지위 이용 및 업무와 관련이 없어 직장 내 성희롱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결했습니다."
최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 관련 대법원 판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내용도 나온다. 오디오 안내에는 없지만, 교육 원고에는 명시돼 있다.
"직원 A가 사장 B와 2001년 11월까지 몇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 A는 어느 순간 B와의 성관계가 성적인 모욕감과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A는 12월 이후 B의 성관계 요구에 거부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B가 손과 허벅지를 만지는 등의 신체적 접촉을 시도했다면 이는 성희롱일까요? 성희롱이 아닙니다."
장 변호사는 "이런 교육은 성범죄를 엄중하게 다루는 법원의 전향적인 태도를 담지도 못하는 데다,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건보공단 측은 "해당 교육 프로그 계약을 급하게 진행하다보니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한 상태"라고 밝혔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여성 중간관리자, 긍정에너지 불어넣어야"
이 와중에 여성가족부 산하 공공기관인 양성평등교육진흥원(양평원)도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작·유통했다. 양평원이 운영하고, 수강자가 1천여명에 달하는 '여성인재 아카데미' 사이트 7개 콘텐츠 가운데 '고(高)성과 창출 여성리더십'이라는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이 도마에 올랐다.
여성 중간관리자 교육에 초점을 맞춘 이 프로그램에서는 '팀빌딩'(team building)을 위해 "긍정적인 말과 표정으로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넣는 것"이라고 했다. '여성 관리자'를 위한 교육에서 이런 내용은 자칫 여성에게만 긍정적 말과 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대목이다.
여성 리더들의 회의 방식과 관련해서도 "여자는 군대를 안 다녀와서 부하직원에게 휘둘리고 통솔 못 한다", "여자라서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등 일부 남자 직원들의 불만사항을 전하며 "우리(여성) 스스로 (그런) 평가 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회의 진행 실력이나 방식은 성별과 무관한 개인 역량과 연관되는 만큼, 여성을 '회의를 잘 진행하지 못한다'고 전제한 교육 콘텐츠는 논리적 타당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관리 책임이 있는 여가부 관계자는 "해당 교육은 2015년에 제작된 것으로, 애초 올해 사용 계획이 없었다"며 "급작스러운 코로나19 상황으로 급하게 온라인 교육을 강화하게 되면서 이전 자료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업데이트를 통해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은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