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으로 하나되다(United by Emotion)라는 슬로건을 내건 2020도쿄올림픽 개막식이 지난 23일 도쿄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려 대한민국 선수들이 입장하는 모습.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올림픽은 각 국가 올림픽위원회가 대표단을 파견해 치르는 종합경기대회다. 대표선수는 올림픽위원회가 파견하지만 사실상 국가대항전의 성격이 강하다. 과거 냉전 시절 서방과 공산진영의 국가들은 체제 우위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전쟁을 방불하는 메달 경쟁을 벌였다. 선수들은 금지약물을 복용하는 등 각종 부정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우리 역시 이런 경쟁체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문 체육인을 육성하기 위해 선수촌을 설립해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은 지는 이미 오래됐다. 스포츠는 국가의 이미지를 바꾸고, 독재권력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됐다.
그래서인지 우리 언론에서 사용하는 스포츠 용어들은 살벌하다고 할 만큼 전투적이다. 태극전사, 격전지, 결전의 날 등 헤아릴 수 없다. 승부를 결정해야 하는 스포츠 경기에 대한 다소 과격한 인식은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지만, 목숨을 걸고 하는 전쟁이 아닌 이상 이런 용어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다.
무엇보다 스포츠와 올림픽에 대한 인식이 시민들은 물론 선수들도 달라졌다. 과거 은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이 시상대에 섰을 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시안게임 혹은 올림픽의 은메달은 정말 엄청난 성과임에도 우리 선수들은 마치 죄인처럼 고개조차 들지 못했고 울먹이는 선수들도 많았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국가의 명운이 걸려있는 참담한 패배가 아니다. 부끄럽거나 죄스럽게 느낄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우리 여자 펜싱 선수들의 모습은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펜싱 여자 에페 대표팀이 지난 27일 일본 지바 마쿠하리 메세 B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펜싱 여자 에페 단체전 시상식에서 기념촬영하는 모습.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결승에서 에스토니아에 아깝게 패배했지만, 경기 후에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는 모습은 과거의 선수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에페팀 선수들은 시상식에서도 자신들이 맞춘 월계관 모양의 반지를 들어 보이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은메달 수상을 자랑스럽게 축하했다.
신유빈이 지난 27일 도쿄체육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탁구 개인전 홍콩 두 호이 켐과 경기에서 공을 바라보는 모습. 연합뉴스17살 탁구천재 신유빈 선수는 어떤가. 16강전에서 아쉽게 탈락했지만, 미소 띤 얼굴로 '단체전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에서 패자의 우울함은 찾아볼 수 없다.
이번 올림픽에서 아쉬운 것은 선수들보다 오히려 언론과 중계방송이다. MBC는 이번 올림픽에서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우크라이나 선수단을 소개하면서 가장 아픈 참상이었던 체르노빌 사건을 언급하고, 심지어 사진까지 싣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를 실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올림픽 중계 역사상 최대 참사라고 할 만하다.
박성제 MBC 사장이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개회식과 남자 축구 중계 등에서 벌어진 그래픽과 자막 사고 등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또한 일부 언론에서는 '태권도 노골드 수모'라는 제목으로 태권도 선수단의 성과를 폄하하기도 했다. 우리 태권도 선수단은 나름대로 큰 성과를 이뤄냈다. 아무리 우리가 태권도의 종주국이라지만, 이미 태권도는 세계적으로 폭넓은 선수층을 가진 국제 스포츠다. 각 체급별로 결선에 오른 선수들의 출신국이 일부 국가에 치우치지 않고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태권도는 당연히 금메달을 따와야 한다는 인식은 이미 낡은 시각이다.
상대 선수를 비하하는 품위 없는 중계방송도 여러 차례 지적됐다. 우리 선수가 득점할 때 과도하게 흥분하고 소리를 지르는 행태도 거슬리는 마찬가지다. 중계방송은 말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달해주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 우리 선수들이 올림픽이라는 중요한 무대에서 잘 싸우기를 응원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라 하더라도, 상대 선수를 비하한다고 해서 우리 선수가 더 잘 싸울 리 만무하다.
이다빈이 지난 27일 일본 지바 마쿠하리 메세A홀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태권도 여자 67㎏ 초과급 결승에서 세르비아의 밀리차 만디치에게 패한 뒤 승자에게 엄지를 들어보이는 모습.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김민기의 '봉우리'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이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을 본 뒤 그 자리에 끼지 못한 채 쓸쓸히 귀국하는 다른 선수들을 위해 만든 노래다.
"(전략)…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 지도 몰라…(중략)" 결승전에서 패배한 뒤 승자에게 웃으며 엄지를 들어 축하해주는 태권도의 이다빈 선수는 그렇게 자신의 '봉우리'에 오른 것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