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사태 비상대응 TF회의. 연합뉴스우리 정부의 외교정책 가운데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대러제재 만큼이나 단시일내 냉온탕을 오간 것도 드물다. 미국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이 정면 충돌한 이례적 사안임을 감안하더라도 정부 대응은 긴 여진을 남긴다.
외교부는 지난 달 22일 대변인 성명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첫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당시 상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뒤 우크라이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지지했다.
외교부는 이틀 뒤인 24일에는 언론 배포자료를 통해 러시아가 전면전을 감행할 경우 수출통제 등 제재에 동참할 가능성을 예고했다. 그럼에도 전제조건인 '전면전' 기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설명하는 등 여전히 신중한 태도였다.
외교부는 반나절 뒤인 이날 밤 대변인 성명에선 러시아를 '강력 규탄'한다고 수위를 높이면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때까지도 대러 독자제재는 검토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독자제재 없다더니 수출·금융제재까지…러시아는 한국을 '비우호국' 지정
하지만 정부 기류는 갑자기 강경 반전했다. 나흘 뒤인 28일 외교부는 대러 수출제재와 금융제재를 결정하며 사실상 독자제재에 나섰다. 금융제재는 러시아 7개 은행과의 거래 중단, 국제금융결제망(SWIFT) 배제 등이 포함된 강력한 조치였다.
러시아는 즉각 반발했다. 주한 러시아 대사는 이날 기자회견을 자청해 우리 정부에 깊은 유감을 표명하고, 남북러 3각협력 등을 거론하며 양국관계 냉각 가능성을 시사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7일에는 '비우호국가'에 한국을 포함시켰다.
연합뉴스그럼에도 정부는 이날 러시아 중앙은행과 국부펀드 등과의 거래 중단 조치 등을 추가했다. 만약 미국이 원유 등 에너지 제재까지 단행할 경우에는 또 다른 추가 제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언의 동참 압박이 올 것이 때문이다.
가치외교 중요하지만 국익도 따져야…"美, EU 주도에 빨려들어가는 느낌"
강대국의 무력 침공을 반대하고 약소국의 주권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정부의 대러제재는 지극히 정당하다. 10위권 경제국으로서 국제적 책임과 역할이 있고 미국 등 서방국과의 보조를 맞출 현실적 필요성도 있다.
그러나 가치외교도 중요하되 궁극적 국익이 훼손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피해야 한다. 정부가 대러 제재에 신중했던 것은 한반도 정세에서의 러시아 영향력을 고려한 나름의 심사숙고가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와 오랜 역사적 맥락으로 얽혀있는 미국, 유럽연합(EU), 일본과 우리의 국익이 같을 수 없다. 우리는 수교 후 30여년 동안 러시아와 크게 얼굴 붉힐 일은 없었다. 러시아는 주변 4강 가운데 한반도 통일에 그나마 우호적인 국가로 평가된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마치 초반 실수(?)를 만회나 하려는 듯 뒤늦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금융제재 대상만 하더라도 지난 1일 기준 EU와 일본이 각각 3개 은행에 그친 반면 한국은 7개였다. SWIFT 배제 조치는 EU보다 늦었지만 러시아 국고채에 대한 거래금지는 우리가 더 빨랐다.
이수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미국과 유럽 주도의 (대러제재) 속도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있다"면서 "명분과 국익 간의 균형을 잡고 방향성은 유지하되 한반도 리스크 측면에서 속도와 범위는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제재 동참했지만 생색도 못 내…美 인사 "한국의 소심한 접근은 어리석어"
정부의 이같은 급변속에 러시아는 물론 미국조차 불편한 반응을 나타냈다. 마크 피츠패트릭 전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지난달 24일 미국의소리(VOA) 인터뷰를 통해 "(대러제재 관련) 한국의 소심하고 미온적인 접근은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우리로선 기껏 어려운 결정을 했지만 생색은커녕 고맙다는 말조차 못 들은 셈이다. 이런 난맥상의 배경에는 정부 내 혼선이 크게 작용했다.
지난 달 24일 발표된 미 상무부의 FDPR(해외직접제품규칙) 면제국 명단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때문에 미국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관측이 줄을 이었다. FDPR은 미국이 통제 대상으로 정한 기술이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경우 외국 제품이라도 미국의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제도이다.
정부는 미국과 협상에 나서 지난 4일 FDPR 면제국 명단에 포함시키는 성과를 거뒀지만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정부는 이미 1월 중순부터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경제제재 방안에 대해 미국 측과 긴밀히 협의해왔다.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 3일 "수출통제 제도가 미국과 다르고, 우리로선 대러 제재가 처음이다 보니 미국과의 협의와 검토 과정에서 다소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과 사전협의 사실 뒤늦게 알려져…부처간 혼선, 불필요한 오해로 국익 훼손
이억원 기획재정부 차관(맨 왼쪽)이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현지 재경관 영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이는 결국 정부가 대러제재와 관련해 적절한 사전설명만 했더라면 불필요한 오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정부 대응은 외교부,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로 나뉘어 제각각이었다. 특히 외교부는 요소수 사태를 계기로 경제안보TF를 확대 강화했음에도 콘트롤타워 역할이 부실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대러제재에 소극적이라는 인상이 한번 심어지자 여론이 악화되고 대외 협상력마저 줄어들면서 등 떠밀리듯 제재 수위를 높이게 됐다. 부처간 유기적 협조 하에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응했다면 국익을 보다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셈이다.
한 전직 외교관은 정부의 대러제재가 강화된 배경에 대해 "미국의 압력이라기 보다는 언론이 굉장히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등 국내 분위기가 더 많이 작용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