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일본 해상자위대 국제관함식 당시 우리 해군이 현지에 보낸 대조영함. 해상자위대 유튜브 캡처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천명하고 나서면서 그동안 잠자고 있던 여러 가지 관련 사안들이 가시화되는 모양새다. 일본 정부는 올해 11월 가나가와현 사가미만에서 열리는 해상자위대 국제관함식을 앞두고 우리 해군에 초청장을 보냈다.
복수의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부는 관함식에 우리 해군 함정을 보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세부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참가하면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이후 7년만이다.
하지만 현재의 한일관계는 '위안부 합의'가 맺어졌던 2015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진 상태다. 여기에 일본 해상자위대가 군기(軍旗)로 사용하는 '욱일기' 등 문제까지 대두돼 여론의 반발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반대로 전문가들은 관함식 참가가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있어, 윤석열 정부의 현명한 대응이 요구된다.
관함식이 뭐길래?…2018년 국제관함식을 둘러싼 '욱일기 논쟁'
2018 당시 대한민국 해군 국제 관함식. 연합뉴스땅 위에 열병식이 있다면, 바다 위에는 관함식이 있다. 말 그대로 싸움배(艦)를 바다에서 보는(觀) 행사인 관함식은 각 나라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열며, 보통은 그때마다 다른 나라 함정들도 초청해 함께 한다.
지구의 2/3는 바다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해군은 국제교류가 잦다. 관함식이 열리면 항구에서도 여러 다양한 행사들을 통해 국제교류가 이어지며, 경우에 따라선 이왕 다른 나라 배들이 온 김에 스케줄을 맞춰 가까운 바다에서 함께 훈련을 하기도 한다.
관함식의 백미는 해상사열로, 관함식을 여는 나라의 군 통수권자가 좌승함(座乘艦) 즉 사열을 받는 함정에 타 각 나라 함정들을 사열한다. 이 때 각 함정들은 좌승함에 대함경례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1998년과 2008년, 2018년에 국제관함식을 열었다. 2018년엔 일본 해상자위대도 초청했지만, 우리 측이 해상사열에서 태극기와 각 나라 국기만을 달아 달라는 요청을 해자대가 거부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유엔 해양법협약 29조는 군함을 "어느 한 국가의 군대에 속한 선박으로서, 그
국가의 국적을 구별할 수 있는 외부표지가 있으며, 그 국가의 정부에 의하여 정식으로 임명되고 그 성명이 그 국가의 적절한 군적부나 이와 동등한 명부에 등재되어 있는 장교의 지휘 아래 있으며 정규군 군율에 따르는 승무원이 배치된 선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군 함정은 보통 바다를 항행할 때 함미에 자국의 국기를 단다. 여기에 더해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는 추가로 그 나라 해군을 상징하는 해군기를 다는 일이 일반적이다.
일본 해상자위대 트위터 캡처일본 해상자위대는 엄밀히 따지면 해군이 아니지만 사실상 해군이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구 일본 해군이 쓰던 욱일기를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해자대 함정이 자위대법에 근거해 욱일기를 게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국제관함식에도 욱일기를 달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해상 사열 때 마스트(배 가운데에 있는 깃대)에
자국 국기와 행사 주체국 국기를 함께 다는 쪽이 국제적 관례라고 주장했지만, 일본 측은 이미 그전에도 욱일기를 단 해자대 함정이 한국에 왔고 관함식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며 거부했다. 결국 우리는 최종적으로 해자대 함정이 욱일기를 게양할 경우 사열 참가를 거부하겠다고 통보했고, 일본은 관함식에 불참했다.
관함식 참석한다 치고, 일장기 문제까지 생긴다면?
지난 7월 림팩 훈련 당시 하와이 진주만-히캄 합동기지에 정박해 있는 우리 해군 세종대왕함(앞)과 문무대왕함(뒤). 자세히 보면 배 가운데 마스트에 성조기가 게양돼 있다. 김형준 기자만약에 당시 일본 해상자위대가 우리 측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마스트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달고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사열하는 모습이 되었을 터다. 이번에는 입장이 바뀌었다.
해군 함정이 다른 나라의 항구에 정박할 때는, 함수와 함미엔 해군기와 자국 국기를 달고 예우 차원에서 마스트에 그 나라 국기를 올리는 일이 국제 관례라고 한다. 실제로 올해 하와이에서 열린 환태평양훈련(RIMPAC)에 참가한 우리 함정들은 정박하면서 태극기와 우리 해군기, 그리고 성조기를 함께 게양한 모습이 현장을 찾은 취재진에 포착됐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일본 버전으로 바꾸면, 우리 함정이 일본 항구에 정박하게 되므로 태극기와 해군기 그리고 일장기를 함께 게양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다만, 과거 일본 국제관함식에 우리 함정이 참가했을 때도 여기에
일장기를 게양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취재진과 접촉한 여러 전·현직 해군 장교들도 "해군 함정이 정박할 때 그 나라 국기를 다는 일이 관례는 맞지만, 필수까지는 아니다"며 "그때그때 함정이 정박하게 되는 이유, 즉 행사나 훈련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 입장에선 일장기 게양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그럴 확률은 0%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박할 때 일장기를 게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2018년 국제관함식 당시 국제 관례를 근거로 들며 태극기와 자국 국기를 게양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만약 일본 측이 해상사열 때 일장기 게양을 요구하면 대처하기 곤란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일본이 이런 요구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욱일기를 단 해자대 함정에 우리가 대함경례를 해야 한다는 점은 그전과 같다.
악화된 한일관계 속 일본은 적반하장…군 전문가들은 '참가', 국민 정서는 부정적
한일관계. 연합뉴스일련의 문제들이 생긴 기원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사안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부터 바라봐야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일본의 우경화와 함께 2018년 강제징용 판결 이후 한일관계가 훨씬 악화됐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당장 한일 사이에 벌어진 '군사적' 갈등만 따져 보아도 2018년 12월 한일 초계기 분쟁, 2019년 7월 수출 규제와 그에 이어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까지 난제들뿐이다.
초계기 사건을 살펴보면 당시 영상기록 등을 종합해볼 때 일본이 먼저 잘못을 했다는 쪽이 대체적인 평가다. 하지만 일본 정부 인사들이 이번 관함식을 계기로 레이더 관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등 적반하장식 대응을 하고 있는 점도 한일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갈수록 커지고 있는 북한과 중국의 위협, 그리고 여기에 맞서기 위해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조하고 있는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 등을 감안하면 마냥 이런 식으로만 흘러가도록 둘 수도 없다는 점에서 정부도 고민이 깊다. 관함식 관련 논란은 그 단면에 가깝다.
국방대 박영준 교수는 "관함식은 국제협력의 상징이고 이번에 수십개 나라들이 오기 때문에 그들과 협력할 수 있는 기회로, 욱일기나 일장기 문제로 거절하게 되면 국익에 손해를 많이 보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국방연구원(KIDA) 유지훈 현역연구위원(해군중령)은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관함식 참가 등 반대를) 주장하는 부분들이 사실 득이 될 것은 별로 없다"며 "욱일기나 일장기 문제와 관련해선 우리 정부가 명확하게 기준을 정해, 일본에 요구할 내용을 정하고 이것이 거부됐을 경우 어떻게 할지까지 정해 두고 대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최일 잠수함연구소장(퇴역 해군대령)은 "우리나라 근처 바다에서 배가 침몰해서 구조에 나서게 된다면, 가장 빨리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일본"이라며 "국민 정서와 해군의 시각이 상충되고 있는데, 욱일기처럼 근본적 해결이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우리 해군과 해상자위대 사이의 교류를 차단하는 일은 손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과의 군사적 협력에 대해선 국민들의 반발이 큰 만큼, 정부는 이 모든 사항을 감안해 관함식 참가 여부를 확정짓고 실무협의를 진행할 전망이다. 민감한 사항이 많은 만큼, 이를 어떻게 매듭짓는지가 윤석열 정부의 대일외교를 평가하는 첫 시험대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