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지역 최고의 쌀 생산지로 평가받는 중국 우창 지역 평원. 바이두 캡처경남 남해군 가천마을은 45도 경사 비탈에 108개 층층 계단에 펼쳐진 680여 개의 다랭이 논으로 유명하다.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았던 선조들의 억척스러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했던 조선인들도 그랬다. 청나라의 봉금령으로 오랫동안 출입이 금지되면서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이곳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 민족의 손길을 거치면서 황무지가 옥토로 변하는 기적이 만들어졌다.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캡처원래 동북 지역은 기온이 낮고 서리도 일찍 내려 벼농사에 불리한 조건이다. 그래서 이 지역 중국인들은 밭농사만 지었다. 물을 가두어 벼를 재배하는 논농사(수전)는 이들에게는 없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벼농사에 익숙했던 이주 조선인들은 논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거친 바람을 맞으며 살얼음이 낀 강물에 들어가 보를 만들고 도랑을 파서 황무지를 개척해 논을 만들었다.
1875년 지린 통화에서 먼저 벼 재배에 성공했고 1890년대에는 두만강변 개산툰 광소촌 일대에서 벼농사가 시작됐다. 1900년에는 해란강변에서도 벼가 재배되면서 연변 각 지역으로 벼가 보급된다.
조선인들은 수전을 위해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서 서쪽으로 북쪽으로 물줄기를 따라 동북 각 지역으로 진출해 조선인 분포지역을 확대해 나갔고 경작면적도 크게 넓어졌다. 1920년대 지린성 연변과 지린의 논농사는 100% 조선인이 짓고 있었고 통화 수전의 85%도 조선인의 손에 있었다.
헤이룽장성 논농사의 100%, 랴오닝성 개원지역은 90%, 홍경지역과 선양지역의 85%, 무순지역의 80%와 단둥지역의 70% 논농사를 조선인들이 개발하고 경작했다. 1930년대 초기에는 동북지역 전체인구의 3%에 불과한 조선인이 생산한 벼는 동북 생산량의 90.1%였다.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캡처벼가 자라네 만주땅 넓은 들에
벼가 자라네 벼가 자라네
우리가 가는 곳에 벼가 있고
벼가 있는 곳에 우리가 있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호미와 바가지 밖에 더 있나
고작 고거냐 비웃지 마라
호미로 파고 바가지로 삼아
만주벌 거친 땅에 벼씨 뿌리며
우리 살림 이룩해 보세 이 노래는 1920년대 초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인 농민들 속에서 널리 불리던 민요다. 드넓은 만주벌에 논을 만들어 볍씨를 뿌린 우리 선조들의 어려운 생활과 벼농사에 대한 애착이 진하게 드러난다.
조선인들의 벼재배 성공은 근대 동북지역 농업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과거 밭농사만 짓던 역사가 종식되고 동북지역 농업구조가 다양화됐다. 조선인 농민들에 의한 수전개발로 오랫동안 황무지였던 소택지와 습지를 논으로 일구면서 경지면적이 크게 증가했다.
또 콩, 수수, 옥수수 등 잡곡만 먹던 동북의 여러 민족의 식생활이 개선됐고, 남방의 쌀이 동북으로 들어오던 구조가 바뀌어 1910년대 말부터는 해외로 수출까지 됐다. 동북 논농사 성공으로 조선인들의 생활도 개선됐다.
동북지역에서도 논농사가 일찍 시작된 화룡지역 평강벌의 현재 모습. 바이두 캡처지금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우창(五常)에서 생산되는 '우창미'는 중국에서 최고의 쌀로 손꼽힌다. 이 쌀도 조선이민들이 1835년 오상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에 의해 최고의 쌀로 거듭나 북경의 왈실 귀족들에게 보내졌다. 1950년대 우창징역의 벼 재배 면적은 근 10만무(亩,1무=666.67㎡)에 달했고, 중국 벼재배 제1현으로 불리고 있다.
우창쌀은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기 때문에 가공회사들은 농업인들과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현대식 거주지를 제공하거나 수확기 쌀값을 당초 계약가격보다 높게 정산해주는 식이다. 한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하지만 연변 쪽에서 태어난 조선족들은 우창다미를 최고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평강벌에서 출하되는 '화룡쌀'이 단연 으뜸으로 치기 때문이다. 화룡쌀은 1956년에 총리가 직접 발행한 '우량 쌀' 인증서를 받았고 시진핑 국가주석도 신발을 벗고 화룡 논에 들어간 적이 있다.
조선족들은 자신들을 동북지역의 개척자로 부른다.
한반도에서 논농사를 들여와 동북지역을 개발하고 식량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항일투쟁을 거쳐 국공내전 기간에는 동북지방을 사수했고 산하이관부터 최남단 하이난다오 해방전에 참가해 무공을 세운 데 대한 강한 자부심이 배어 있는 말이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