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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 암흑기 건너 개혁개방의 주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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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혁명 암흑기 건너 개혁개방의 주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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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족 길을 묻다

    1992년 8월 한중수교는 한민족이지만 수 십 년을 떨어져 살아오던 조선족과의 본격적인 만남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선족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모국 땅을 밟아 주로 저임금 기피 업종에서 일하며 사회 발전에 기여했지만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그 사이 중국에서는 전통적 집거지였던 동북지역을 벗어나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새로운 기회와 위기를 맞고 있다. CBS 노컷뉴스는 한중수교 30주년을 맞아 언론재단 지원으로 조선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펴보는 기획시리즈 '조선족 길을 묻다'를 준비했다.

    ▶ 글 싣는 순서
    ①한 핏줄부터 우리말 하는 중국인이라는 생각까지
    ②"이거 먹어 봤어?"부터 "한국 좋은 사람 많아"까지
    ③[르포]옌지는 지금 공사중…조선족의 서울 옌지를 가다
    ④한반도 이주부터 중국공민이 되기까지
    ⑤중국 동북지역 개척자…황무지를 옥토로
    ⑥문화혁명 암흑기 건너 개혁개방의 주체로
    (계속)

    알렉산더 판초프 '모택동 평전' 캡처알렉산더 판초프 '모택동 평전' 캡처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선인으로 살던 우리 민족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한민족사와 조선민족사에서 분기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람' 또는 '조선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에서 조선인, 조선 사람 등으로 불리던 일군의 우리 민족이 다민족 국가인 중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이다. 한반도와 연결성이 강했던 조선인 대신에 중국인으로서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중국 동북지방을 근거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중국 공산당은 동북지역 조선인과 조선족인 된 우리 민족의 한 갈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조선인에게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주체도 중국 공산당이지만 이들에게 1950년대 후반부터 몰아닥친 정풍운동, 반우파투쟁, 문화혁명 등 모진 시련의 출발점과 결자해지의 당사자도 공산당이다.
     
    연변대학교 개학식 모습. 처음에는 연길대학으로 문을 열었다. 소후닷컴 캡처연변대학교 개학식 모습. 처음에는 연길대학으로 문을 열었다. 소후닷컴 캡처
    조선민족자치구와 자치향 등을 중심으로 민족자치를 광범위하게 인정받던 조선족은 1950년대 후반 위기에 처한다.
     
    시작은 1957년 봄의 백화제방·백가쟁명이었다. 조선족 간부와 지식인들은 이 쌍백운동에 큰 기대를 걸고 적극 참여했지만 한 달 여 만에 반우파 투쟁으로 국면이 전환되면서 수많은 지식인과 작가, 기자, 예술인, 젊은 학생들이 '우파분자' 감투를 쓰고 비판대에 서야했다.
     
    조선족 간부와 지식인들은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민족정풍운동에도 참가해야 했는데 일부 간부와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분자'로 몰려 우파 분자와 똑같은 고초를 겪었다.
     
    연변지역 등 조선족 사회에서는 반우파 투쟁과 민족 정풍운동이 거의 동시에 진행됐다. 반우파 투쟁이 조선족 사회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제거하는데 목적을 두고 민족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됨으로 써 자연스럽게 민족 정풍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문화혁명을 10년으로 표현한 cctv의 한 장면. 바이두 캡처문화혁명을 10년으로 표현한 cctv의 한 장면. 바이두 캡처
    1966년 3월부터 1976년까지는 중국 대륙을 엄청난 혼란에 빠뜨렸던 문화대혁명 10년의 시기다. 이 시기에 조선족들도 심한 피해를 당했다. 수많은 조선족 간부와 의식 있는 조선족들이 외국간첩이나 특무, 반역자, 지하국민당 당원 등으로 몰려 맞아죽거나 자살하거나 감옥에 갔다.
     
    조선족 역사에 밝은 한 인사는 "동북지역이 한반도와 접해 있고 한반도 남쪽에는 미국의 괴뢰라고 여겼던 한국이 있었고 북한도 문화혁명 다시 중국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조선족의 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에서는 문화대혁명 기간에 3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5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거나 불구가 됐다. 직접 끌려나와 비판을 받은 사람이 2만여 명이었고 직접 연루된 사람이 10만 명이었다.
     
    문혁기간에 소위 '계급대오정리운동'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사법계통에 있던 175명의 조선족 간부와 경찰이 외국특무로 몰렸는데 이는 연변주 전체 정법계통 조선족 간부, 경찰 총수의 70%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12명이 맞아 죽고 82명이 종신 불구자가 됐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대 주장을 지냈던 주덕해. 소후닷컴 캡처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대 주장을 지냈던 주덕해. 소후닷컴 캡처
    남한에 이승만이 있고 북한에 김일성이 있다면 조선족에는 이 사람이 있다고 했을 정도였던 혁명가이자 정치가였던 연변조선족자치주 1대 주장 주덕해도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이 기간에 민족 문화와 교육도 시련에 처한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조선어무용론이 대두돼 조선어의 지위가 크게 내려갔고 번역기구는 취소되었고 조선어 잡지는 폐간됐다.
     

    조선족 단일학교가 한족학교에 병합되거나 폐교됐다. 조선어학교의 조선어문 과정이 취소되기도 했고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은 학생들을 받지 못했다. 문화혁명 전에 연변대학 학생의 민족비례는 조선족이 80%, 기타 민족이 20%였지만 문화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는 비례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모택동의 농촌하방 지시에 따라 조선족 지식 청년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학교에서 정규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면서 조선족 인재의 단층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체포돼 재판받는 강청 등 문화혁명 4인방. 바이두 캡처체포돼 재판받는 강청 등 문화혁명 4인방. 바이두 캡처
    1976년 9월에 모택동이 사망하고 10월에 이른바 4인방이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린다. 조선족 사회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끝내고 개혁개방의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차 전원회의(11기 3중전회의)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이 채택된 이후 중국은 큰 변화를 맞는다.
     
    조선족들도 1980년대 초부터 농사 외에 다른 경영활동에도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점차 토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상공업 영역에 뛰어들었고 도시로 진줄했다.
     
    조선족은 적응력이 강한 민족이다. 선조들이 조선반도를 떠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동북땅에 발을 붙이면서 시작된 개척과 모험의 유전인자(DNA)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의 물결이 전 중국에 퍼지자 조선족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던 정든 땅과 고향 마을을 떠나 낯선 지방으로 이동해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아간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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