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공동취재단한국은행 이창용 총재가 지난달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안개가 심할 때는 차를 세워야 한다"고 했지만 안개는 점차 짙어지는 분위기, 시장의 변동성은 확대되고 있다. 급한 불이 꺼진 줄 알았던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의 여진이 이어지고 월가 거물들이 추가 위험을 잇따라 경고하는 상황 속에서 통화정책 주체인 한은도 예상 밖 파급효과를 지켜보며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 경기 안정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다음 달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해야 하는 한은의 고민은 16일 박기영 금융통화위원의 발언에도 그대로 묻어났다. 그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금통위 회의 때마다 한국의 물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결정, 중국 상황 등이 겹쳐 5차 방정식을 푸는 기분이었는데 요즘은 7차 혹은 8차 방정식이 된 것 같다"며 최근 SVB 사태를 비롯해 잇따라 바뀌는 조건들에 대한 고충을 토로했다.
박 위원은 "SVB의 경우 (금융리스크를 막기 위한 미 정부의 적극적 개입 등으로) 이 정도면 제어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 여파가 스위스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CS)로 가서 곤란한 상황"이라며 "시장 상황을 봐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SVB 사태가 미국과 유럽은 물론, 한국까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연합뉴스실제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인 핑크는 15일(현지 시각) 투자자에게 보내는 연례 서한에서 SVB 사태에 대해 "미국 지역 은행권 전반 피해가 어느 정도 규모로 확산될 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억만장자 투자자 레이 달리오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설립자도 14일 링크드인 뉴스레터를 통해 SVB 사태가 세계 금융시스템의 균열 신호라는 취지에서 "탄광 속의 카나리아"라고 말했다. SVB 사태가 탄광 속에서 유해가스에 민감한 새 카나리아의 이상행동 같다는 것이다. 그는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은행 파산이 잇따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의 시선은 그간 공격적 긴축 행보를 이어온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에 쏠린다. 불과 2주 전만해도 탄탄한 고용지표에 목표치(2%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소비자물가 등을 근거로 이번달 연방공개시장공개위(FOMC)에서 빅스텝(기준금리 0.5%p인상)을 단행할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하지만 연준이 SVB 파산에 따른 금융시장 리스크 확대라는 이슈를 고려해 오는 21~22일 열리는 FOMC에서 금리를 동결하거나 베이비스텝(기준금리 0.25%p)을 밟는 것으로 전망이 뒤집혔다. 제롬 파월 의장의 경우 SVB 사태로 은행 감독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는 상황이다.
연합뉴스미 연준의 다음 주 통화정책회의 결과는 한은의 다음 달 금리 결정에도 주요 변수가 된다. 한은 입장에서는 미 연준의 긴축강화 기조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한미 기준금리 격차 확대 등의 부담은 덜었다. 씨티 김진욱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16일 보고서에서 연준이 금리를 0.25%p만 인상하고 7월까지 5.5~5.75%까지 인상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한은의 최종금리도 3.5%에서 멈출 것이라는 기존 전망을 유지했다.
한은은 우리 근원물가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의깊게 살필 것으로 보인다. 박기영 금통위원은 "개인적으로 아직 한 번도 피벗(통화정책 선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금리인하 가능성에 선을 그으면서 "물가 경로가 목표수준인 2%대로 가면 좋은데, (변동성이 큰 에너지·식품을 제외한 물가인) 근원물가를 좀 더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