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의 얀 마텔 작가가 13일 서울 중구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 기념 초청 첫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민수 기자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경제 지도자와 같은 책임이 따르는 리더에게 소설과 같은 문학을 접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비전이 무엇인지 이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 대중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한 가치를 꿈꿔야 하는데, 정치인과 같은 리더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끔찍한 악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파이 이야기'로 2002년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한 얀 마텔은 사회 리더들에게 책 읽기를 주문했다. 리더에게 대중이 기대하는 가치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데, 특히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사회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필요한 상상력과 지식은 단순히 팩트 정보에서만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형적인 중년 백인이었던 스티븐 하퍼 전 캐나다 총리의 예를 들며 그가 12살 흑인 소녀 피콜라가 인종차별과 가난, 성폭력, 학대에 놓인 채 푸른 눈동자에 강한 집착을 가진 미쳐버린 삶을 살 수 밖에 없던 비극적 운명을 그린 흑인 여성작가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The Bluest Eye)'을 읽은 뒤 그의 삶에 아무런 관련이 없던 흑인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이해하게 됐다며 책을 읽으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고 강조했다.
얀 마텔은 2007년 4월부터 약 4년간 당시 캐나다 총리였던 스티븐 하퍼에게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국가 지도자에게 어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담아 101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를 엮어낸 책은 캐나다를 비롯해 국내외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서울국제도서전 초청작가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얀 마텔은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인상도 밝혔다.
그는 "처음 한국을 방문해 DMZ를 관광했는데 사실 '전쟁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비극을 마주할 수 있었다"며 "이 군사분계선을 사이로 남한과 북한이 극명하게 차이 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보며 어떻게 안고 살아갈지 깊이 생각해본 이례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곧 출간될 차기작인 장편소설 '선 오브 노바디'(Son of Nobody·가제)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트로이 전쟁을 현대적인 상상력을 불어넣어 재해석한 작품으로, 고대 파피루스를 연구하는 한 젊은 학자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발굴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2024년 영미권에서 먼저 출간될 예정이다.
얀 마텔의 첫 방한을 기념해 출판사 작가정신은 그의 데뷔작인 소설집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과 베스트셀러 '파이 이야기'를 한 권으로 묶은 특별 합본판도 내놨다.
그는 "제 첫 책이자 단편 소설들이 유명해진 계기가 된 '파이 이야기'와 함께 합본으로 출간돼 나이가 들고 작가로서 발전했다는 생각이 우선 든다"며 "이야기는 저의 인생철학이다. 더 성공해야겠다는 욕심보다 저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13일 서울 중구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 기념 초청 첫 내한 기자간담회를 개최한 얀 마텔은 30년 간 글을 쓸 수 있었던 영감의 원동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의 얀 마텔 작가가 13일 서울 중구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 기념 초청 첫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음은 얀 마텔과의 일문일답 |
▶처음 한국을 방문한 소감은?
= 한국에 초대받게 돼 기쁘다. 아들과 일주일 전에 입국해서 서울과 속초에서 지냈다. 활발하고 생기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거인과 같은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한국이 캐나다와는 굉장히 달라서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한국 음식이 너무 좋다. 한국이 산과 숲이 많은지 몰랐는데 캐나다와 비슷한 것 같다. 지리적으로 섬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도시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어떤 영감을 가지게 됐는지, 새로운 작품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 아직 어떤 영감 얻었다고 말하기는 이른 것 같다. 제가 생각을 천천히 하다보니 한국에 대해 아직 많은 것을 소화중이다. 이번 방문길에 함께 한 아들과 아들 친구와 셋이서 DMZ 관광을 갔다. 사실 '전쟁 관광'인데 자본주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어려운 삶을 살고 남쪽은 더 윤택한 삶을 살고 있는데 이 DMZ(군사분계선)를 사이에 두고 그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나있는 것 같아보였다. 이례적인 경험이었다.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에 대해 어떻게 안고 살아갈지 생각 중이다.
서울에서 당분간 계속 지낼거라 남은 시간 고궁, 박물관, 전통시장 등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곳에 갈 예정이다. 곧 출판될 책이 있는데 편집자가 보고 있는 동안 새로운 책을 썼다. 내러티브에 대한 실험인데, 기억의 손실이 내러티브의 손실이라고 생각하고 초안을 구성했다. 지금은 완성됐고 이번에 새로 출판된 책의 차기작이 될 것이다.
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의 얀 마텔 작가가 13일 서울 중구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 기념 초청 첫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차기작 '선 오브 노바디'가 출간될 예정인데, 트로이 전쟁에 대한 소설 구상은 어떻게 하게 됐나?
=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다가 영감을 얻었다. 책을 쓸 생각은 아니었고 그냥 읽어보자 하고 봤다가 뭔가 느껴져 작품으로 쓰게 됐다. 일리아드의 등장 인물들은 왕이나 귀족들이지만 유일하게 한 명의 평민이 등장해 짧게 '이건 왜 이런가' 하고 묻자 율리시스가 그 평민을 폭행한다. '선 오브 노바디'에서는 그 유일한 발언을 한 평민의 친구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내용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일리아드에 왕과 귀족들만 발언권이 있듯이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가진 자들만 발언권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결국 그리스와 트로이 두 문명이 모두 파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오늘날 탐욕이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 캐나다 총리에게 쓴 '101통의 문학 편지'로 화제가 됐다. 최근 독서 열기가 많이 가라앉고 있다. 한국의 국가 지도자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조언한다면?
= 좋은 질문이다. 나는 원래 '이런 책을 읽어라,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같은 고전을 읽어라' 하지 않는다. 다만 민주주의사회에서는 그런 책임이 따르는 이들에게는 책 읽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의 리더든, 기업 총수든, 경찰이든 민중들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어느 정도 교육수준을 받았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일에 대한 경험, 상상력(창의력)에 대한 것도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 늘 현명한 스승을 둘 수 없기에 책과 같은 스승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소설과 같은 문학을 읽으면 다양한 교양과 지식을 두루 갖추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 당신의 비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서구에서 대표되는 백인은 20대 중반이 되면 책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여성은 좀 나은 편이지만 캐나다 사회 주류는 백인 중년 남성들이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이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사회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필요한 상상력(창의력)과 지식은 단순히 팩트 정보에서만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전형적인 백인 중년층이었던 스티븐 하퍼 전 캐나다 총리가 12살 흑인 소녀 피콜라가 인종차별과 가난, 성폭력, 학대에 놓인채 푸른 눈동자에 강한 집착을 가진 미쳐버린 삶을 살 수 밖에 없던 비극적 운명을 그린 '가장 푸른 눈'을 읽은 뒤 그의 삶에 아무런 관련이 없던 흑인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이해하게 됐다. 책을 읽으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정치인 등 리더들이 책을 읽지 않은면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한 가치를 꿈꾸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나?
= 인도를 여행할 때 영감을 얻었다. 인도 사람들이 개방적인데 특히 힌두교가 그렇다. 상대적으로 유일신을 숭배하는 배타적인 기독교에 비해 힌두교는 수천, 수만 명의 신들이 존재하고 이를 모두 수용한다. 심지어 예수라는 인물 이야기를 듣고 그런 신이 있냐 하며 힌두신전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외부 세계로부터 전혀 압박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많은 인도 사람들을 만나며 친절하고 개방적인 모습에 '파이 이야기'의 영감으로 작용했다. 나의 부모님은 종교를 가지라고 하는 대신 예술과 같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인생공부를 해야한다고 하셨다. 인도 여행 당시 다른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인도에서 제가 등한시 했던 종교, 자연에서 만난 동물들이 많이 와 닿았다. 종교(힌두교)가 인간과 신적인 존재, 동물들을 만나는 접점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힌두교와 같은 종교가 절대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는 그것은 놔두고 가장 긍정적인 것만을 끌어냈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 컴퓨터도 고도화 됐지만 도구에 불과하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거나 무엇이 될지에 영향을 끼지치 않는다. 끼친다면 그것은 예술과 같은 다양한 경험과 (정신적으로) 종교뿐이다. '파이 이야기'는 그런 관점에서 신이란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고 쓴 것이다.
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의 얀 마텔 작가가 13일 서울 중구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 기념 초청 첫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민수 기자▶올해 데뷔 30주년이다. 계속해서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봉투에 글을 모아 쓰는 습관이 있다고 하는데?
= 제가 이야기를 읽었을 때 스릴이 느껴질 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된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게 만들고 스토리 아이디어가 만들어졌을 때 가슴이 흥분된다. '파이 이야기'도 한 소년이 태평양을 건넌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고 느꼈다.
봉투에 여러 글을 모아두는 것은 제가 책을 쓰는 하나의 방법이다.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조사를 거쳐야 한다. '파이 이야기'도 동물과 동물원, 바다에서의 생존스킬 등을 다 조사해야 했다. 곧 출간 예정인 '선 오브 노바디' 역시 호메로스에 대해 연구해야 했다. 그렇게 쓴 자료가 300~400페이지 되는데 책 쓸 때 그 첫 봉투를 열고 작가의 이야기가 된다. 물론 컴퓨터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지만 저는 이런 방법을 선호한다.
▶출판사가 작가의 첫 방한을 기념해 특별 합본판을 출간했다. 데뷔작과 베스트셀러가 된 '파이 이야기'를 함께 묶어냈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
= 저의 첫 작품인 단편소설과 베스트셀러 작품이 같이 있는 책이라서 좋다. 이 합본판을 통해 나이가 들고 작가로서 더 발전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글을 쓰는 데 더 실험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문제를 붙들고 있지 않고 잠시 내려놓고 시간을 갖고 돌아오면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을 통해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스토리는 제 인생철학이다.
▶이번 방한 기간 한국 팬들과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생겼다. 독자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나?
= 강연이 예정돼 있는데 주최 측에서도 요청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알려준 게 없다.(웃음) 제가 미리 준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창의력(창의성)에 대해 이야기 할 것 같다. 공동창작 트렌드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피카소가 게르니카 어떻게 그리게 됐는지, '파이 이야기'를 어떻게 어떻게 쓰게됐는지, 종교가 인생을 이해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강연 내용은 아마도 시작 10분 전쯤 정해질 것 같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