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으로 만든 날의 벽. 사진 소농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1905년, 한인 1033명은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주의 수도 메리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명 애니깽(에네켄·용설란의 일종)으로 불리는 이들의 이주 뒤에는 멕시코 대농장주의 대리인 존 G. 마이어스와 일본 이민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의 결탁이 있었다.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에 주목한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가 오는 6일부터 2024년 2월 2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다.
올해 'MMCA 현대차 시리즈' 작가로 선정된 정연두(54)는 이번 전시에서 한국과 멕시코를 잇는 식물과 사람의 백년 여행기를 영상, 설치, 공연 등 다양한 시각 언어로 재구성했다. 신작 4점 포함 총 5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20세기 초 이민자의 시간과 경험에 다가가기 위해 2022년부터 2년에 걸쳐 멕시코를 3회 방문해 한인 이민 2~5세 후손을 인터뷰했고, 그들을 멕시코로 이끈 과거 유카탄의 에네켄 농장에서 다양한 열대식물을 촬영했다.
정연두 상상곡. 사진 소농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미술관의 열린 공간, 서울박스에 들어서면 사운드 설치 신작 '상상곡'(2023)을 만날 수 있다. 천장에는 식물 이파리와 붉은색 열매를 형상화한 오브제가 매달려 있는데 그 안에 내장된 초지향성 스피커에서 환청과도 같은 속삭임이 들린다.
속삭임의 주인공은 2023년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 오늘 가장 그리운 사람, 희망과 꿈에 대한 물음에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 헝가리어, 텔루구어, 인도네시아어 등으로 답한다. 젊은 재한외국인의 목소리는 20세기 초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이 이질적인 시공간과 조우하며 겪었을 낯섦의 감각을 유추하게 한다.
백년 여행기-프롤로그. 사진 소농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5전시실 입구에는 '백년 여행기-프롤로그'(2022)가 설치됐다. 백년초의 이주 설화를 마임니스트의 손 퍼포먼스로 기록한 영상과 에네켄 농장을 형상화한 작은 무대를 통해 보여준다. 설화는 200여 년 전 선인장 씨앗이 멕시코에서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밀려와 머나먼 제주도에 뿌리내렸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작가는 지난해 제주도의 한 레지던스에서 9개월 동안 머물며 백년초 마을을 방문했고 이때 듣게 된 백년초의 이주 이야기에서 모순된 경로로 이뤄진 한인의 멕시코 이주 역사를 떠올렸다.
'세대의 초상'(2023)은 두 대의 LED 대형 패녈을 마주 보는 형태로 설치했다. 패널 한 쪽에는 부모, 다른 한 쪽은 자녀의 모습을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후 1초당 500프레임 이상으로 편집해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한인 후손 세대 간 역사·문화적 간극을 상상하게 한다.
'백년 여행기'(2022)는 LED 단채널 영상과 3채널의 공연 영상으로 구성된 4채널 영상 설치 작품이다. 3채널 영상은 작가가 직접 연출한 한국의 판소리와 일본의 기다유 분라쿠, 멕시코의 마리아치 공연을 기록했다. 또한 각 공연의 음악적 운율은 LED 단채널 영상 이미지와 시각적으로 조응해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12m 높이 벽면 설치 '날의 벽'(2023)은 설탕 뽑기 방식으로 전 세계 농기구(마체테) 모양의 오브제를 만들고 이를 디아스포라의 어원적 원류인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서 착안해 거대한 벽 형태로 쌓아 올렸다. 흡음재로 마감한 이곳은 소리가 차단돼 사유하기에 좋은 공간이 됐다.
작가는 이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지난해 8월 15일 메리다에 갔을 때 우연히 참석한 한인 행사에서 후손들이 태극기 깃발을 들고 만세삼창을 외치는 모습을 봤다"며 "1960년대에 한국과 멕시코가 수교하기 전까지 잊혀졌던, 새로운 곳에 뿌리 내린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관심이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정연두 작가. 문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