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휴전 직후 육군 법무관 중령으로 제대 하면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김봉길 변호사. 오른쪽은 박정희 정부의 국가배상법·법원조직법 위헌 판결문. 김봉길 변호사 유족 제공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의 국가배상 축소에 위헌 판결을 이끌어내며, 개인권리 구제를 위해 독재에 맞서다 혹독한 대가를 치른 고 김봉길 변호사와 관련한 진상 조사가 시작됐다.
박 대통령 지시에 따른 대대적인 구금 조사가 벌어진 지 50년 만이다.
불법 수사·가혹행위 개연성 판단 '조사 개시'
27일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위원회는 전날 전체위원회를 열고 김 변호사와 그의 사무실 서기였던 고 최봉섭 씨 등을 상대로 한 중앙정보부(중정, 국정원 전신)의 불법수사 사건에 대한 조사개시를 의결했다.
국가배상소송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던 김씨 등이 중정 안가로 통하던 내자호텔에 불려가 수일간 구금된 상태에서 수사 받은 끝에,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게 핵심이다.
수사관들의 가혹행위 등으로 허위 자백을 함으로써 법률사무취급단속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정직 8개월의 징계 처분을 받았다는 취지다.
진실규명 신청인 측은 국민들의 권리구제를 위해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을 받아내자 중정 주도로 김씨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사건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간판. 위원회 측 제공먼저 진실화해위원회는 "시대적 상황과 언론보도, 이중배상금지규정 관련 논란, 신청인들의 구체적 진술 등이 존재한다"며 "진실규명 대상자가 불법 구금돼 조사받은 점과 수사 과정에서 고문·가혹행위의 개연성이 있으므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조사 개시 사유를 밝혔다.
이어 "1972년 1월 17일 법무부 연두순시에서 '대통령의 악덕 변호사 발본색원' 지시가 내려졌다"며 "나흘 뒤 김 변호사가 연행돼 구속되는 장면이나 또 다른 변호사가 중정 안가로 불리던 내자호텔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도 언론기사를 통해 확인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 변호사 등에게 적용된 범죄 혐의가 당시 정부조직법과 중앙정보부법에 의거한 중정의 수사 범위에 객관적으로 해당된다고 볼 수 없다"며 "중정이 대통령 지시를 근거로 법상 직무범위를 벗어난 위법한 수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실제 과거 중앙정보부법 제2조(직무)를 보면 중정의 직무는 △국외정보 및 국내보안정보의 수집·작성 및 배포 △국가기밀에 속하는 보안업무 △형법중 내란의 죄·외환의 죄에 대한 수사 등으로 제한돼 있다.
개인 구제 '모범 변호사'→독재의 '악덕' 낙인
미국 이주 10년 후 셋째 아들 김률의 캘리포니아 변호사 합격을 기념해 그간 간직했던 법복을 물려주며 기념 사진을 찍은 김봉길 변호사 모습. 김봉길 변호사 유족 제공1960년대 법조계에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파병 등의 피해를 호소하는 장병과 토지주 등이 늘면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이 잇따랐다.
이에 재정 부담을 느낀 정부는 1968년 군인 등에 대한 국가배상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 개정안을 입법했다. 대법원의 위헌 판결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에게 '특별 지시'를 하는가 하면, 법원조직법까지 개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의 시도는 김씨가 맡았던 군 희생자 국가배상 사건의 1971년 상고심에서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 박탈'이라는 위헌 판결이 나면서 제동이 걸렸다.
이는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졌던 사법부가 행정부에 위헌 판결을 내린 국내 최초 사례다. 독재에 맞서 '삼권분립'의 기틀이 됐다는 상징성으로 이 판결문은 지금도 대법원에 전시돼 있다.
대법원 법원전시관에 전시된 박정희 정부의 국가배상법·법원조직법 위헌 판결문. 김봉길 변호사 유족 제공이처럼 '비상입법'이 가로막히자 정부는 이듬해 민주주의 원칙을 뒤집는 유신체제에 돌입, 대법원은 위헌심사권을 헌법위원회에 빼앗겼고 유신헌법은 군인, 경찰관 등이 국가에 배상 청구를 못 하도록 규정해 아예 위헌 소지를 없앴다.
또한 위헌 의견을 냈던 대법원 판사 9명 모두 재임용에서 탈락하는 등 국가 응징의 화살은 개인들에게도 향했다.
이런 맥락에서 김씨 역시 위헌 판결 다음 해인 1972년 처남이 법대 졸업 뒤 사무실에서 일하며 일부 사건들을 소개했던 게 '불법 사건 브로커' 고용행위로 지목돼 수사를 받게 됐다.
같은 해 법무부 새해 순시에서 "법을 잘 아는 변호사들의 악덕행위를 뿌리 뽑으라"는 박 대통령 지시가 내려진 데 따른 후속 조치였던 것.
결국 김씨는 탈세·배임·사기·횡령죄 등으로 입건된 또 다른 변호사들을 비롯한 브로커 50여명과 함께 구속기소 돼 유죄(벌금 20만 원)를 선고받았다. 변호사협회의 정직 처분도 이어졌다.
이후 일부 자녀들까지 긴급조치로 감옥에 가거나 감시당하는 등, 국가의 철저한 응징에 김씨는 법적 대응 의지마저 상실한 채 2년 뒤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정부에 배상 책임을 캐묻는 눈엣가시가 된 결과로, 사실상 정치적 망명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사필귀정 향한 첫발"…진상 규명 촉구 한목소리
김 변호사가 수사관들에 의해 경찰로 연행되고 있는 모습이 담긴 당시 신문기사 지면. 김봉길 변호사 유족 제공반백 년 만에 진상 규명을 위한 문을 두드린 유족 측은 "비록 늦었지만 사필귀정을 향한 소중한 첫 걸음"이라며 진실화해위의 조사 개시 결정을 반겼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변호사가 된 셋째 아들 률(67)씨는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늦게나마 가해자였던 정부 스스로 조사를 하게 됐다는 의미가 크다"고 심경을 전했다.
또 "(아버지는) 유신독재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았고, 인권옹호와 사회정의를 위해 사명을 다했다"며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정과 검찰, 언론을 총동원해 명예와 재산뿐만 아니라 의대생이던 둘째 아들은 긴급조치로 감옥을 가는 등 가족의 삶까지 짓밟았다"고 토로했다.
특히 "불법 감금 수사로 가해진 인권침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며 "이번 조사를 통해 변호사들이 공공성을 지닌 법률전문가로서 독립된 직무를 자유롭게 수행하는 확실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변호사 단체도 독재에 저항하며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켜낸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을 내세워, 명확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데 목소리를 보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과거사위원회 관계자는 "박정희 정부는 사법부 장악을 위해 1971년 7월 현직 부장판사에 구속영장을 청구함으로써 이른바 제1차 사법파동을 불러일으켰다"며 "이듬해에는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을 받아낸 변호사에 대한 탄압을 개시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신청인(김 변호사)은 중정 안가에 구금된 상태로 강도 높은 수사를 받고 피의사실 공표에 의한 망신주기 등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허위자백에 이르게 됐다"며 "사법파동 등에 대해서는 민주화 이후 재평가를 받고 있으나, 신청인을 비롯한 변호사들의 변호권 탄압에 대한 내용은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조사 개시를 계기로 법조인들에 대해 자행된 인권침해의 진실과 일반 국민들의 변호인 조력권 침해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길 기대한다"며 적극적인 조사를 촉구했다.
앞서 CBS노컷뉴스는 고 김봉길 변호사가 사법부의 독립성 수호에 기여한 역사적 의미와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탄압받은 정황 등을 보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