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비극의 씨앗, 밸푸어 선언
ALJAZEERA 홈페이지 캡처■100년보다 더 오래전인 1917년 11월 2일,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밸푸어는 영국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인 라이오넬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67단어로 된 짧은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팔레스타인에 지진과 같은 영향을 미쳤고 그 여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편지는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 수립과 그 목적 달성의 촉진을 약속한 것이다. 이 편지는 밸푸어 선언으로 알려져 있다.
■본질적으로, 유럽의 한 강대국이 팔레스타인 아랍 원주민들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에 시온주의 운동을 약속한 것이다.
■영국 위임통치령은 1923년에 만들어졌고 1948년까지 지속됐다. 그 기간 동안, 영국은 대규모 유대인 이민을 촉진했다. 새로운 거주자들의 많은 사람들은 유럽의 나치즘을 피해 달아났다. 그들은 그러나 반대시위 및 파업과도 직면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 나라의 인구 통계의 변화와 유대인 정착자들에게 물려줄 그들의 땅을 영국이 몰수하는 것에 대해 놀랐다.
▶ 밸푸어 선언이 나온 배경 |
유태인들은 1세기경 로마제국의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에서 진 뒤 2000년 동안 고향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야하는 유랑민의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특유의 강인한 민족성에 자립의 DNA가 결합되면서 유태인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경제, 산업, 금융면에서 세계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로 등극한다. 1차 세계대전은 그런 유태인들에게 날개를 다는 환경을 만들었다. 1차대전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유태인 및 아랍인들과 별도의 이중계약을 맺는다. 그 가운데 유태인과 맺은 계약이 '밸푸어 선언'이다. 아서 밸푸어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 유태계 금융재벌 월터 로스차일드 백작에게 보낸 편지다. 영국 외무장관이 금융재벌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유대 자본이 영국의 전쟁공채를 매입하지 않으면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유태인이 지배계급을 형성중인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서도 유태인의 환심을 사야했다. 특히 유태인 과학자들로부터 무기제조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도 유태계에 러브콜을 보내야했다. 그러나 밸푸어 선언은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영국정부의 2년전 '맥마흔 선언'(1915년)과 배치된다. 영국은 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통치하면서 유대인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맥마흔 선언을 폐기하고 밸푸어 선언을 실천에 옮긴 셈이다. 이로 인해 중동지역이 세계의 화약고로 변질되는 현상을 보던 영국이 밸푸어 선언이 명예롭지 못한 결정이었다는 사과를 낸 것은 2002년이었다. 아래는 밸푸어 선언의 전문이다.
"국왕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 수립을 찬성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팔레스타인 내 기존 비 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모든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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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벌어진 일
■고조되는 긴장은 결국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된 아랍 반란으로 이어졌다.
■1936년 4월, 새로 구성된 아랍 국가 위원회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국 식민주의와 유대인 이민 증가에 항의하기 위해 총파업을 시작하고 세금 납부 거부와 유대인 제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6개월간의 파업은 영국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영국군은 대규모 체포 작전을 벌였고, 징벌적인 가옥 철거에 나섰다. 이는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관행적으로 지속돼 온 행위들이다.
■1937년 말에 시작된 2차 봉기는 팔레스타인 농민 저항 운동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때 저항의 대상은 영국군과 식민주의였다.
■1939년 하반기까지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3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항공기들은 마을들을 폭격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으며, 가옥들은 철거되었고, 구금과 즉결 살인이 횡행했다.
■이와 병행해, 영국은 유대인 정착민 공동체(이슈브, Yishuv)와 협력해 무장 단체를 결성하고 '야간 특전 부대'(SNS)라는 이름의 영국 주도의 군대를 결성했다.
■이슈브 내부에서는 무기가 비밀리에 수입됐고 나중에 이스라엘 군대의 핵심이 된 유대인 준군사조직인 하가나(Haganah)를 확대하기 위해 무기 공장이 설립됐다.
■봉기가 일어난 3년 동안 팔레스타인인 5천명이 사망했고, 1만5천명에서 2만명이 부상을 입었고, 5600명이 투옥됐다.
UN의 분할 계획
■1947년까지 유대인 인구는 팔레스타인의 33%로 증가했지만, 그들은 땅의 6%만을 소유했다.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 181호를 채택했다.
■팔레스타인은 이를 거부했다. 팔레스타인의 56%를 대부분의 비옥한 해안 지역을 포함한 유대인 국가에 할당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94%를 소유했고 인구의 67%를 차지했다.
1948년 나크바(Nakba, 팔레스타인 인종청소)
팔레스타인 나크바의 날 행사 모습. 연합뉴스 ■1948년 5월 14일 영국 위임통치령이 만료되기도 전에, 시온주의 준군사조직들은 향후 탄생할 국가의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마을과 도시들을 파괴하는 군사 작전에 이미 착수했다.
■1948년 4월 예루살렘 외곽의 데이르 야신 마을에서 팔레스타인 남성, 여성, 어린이 100여 명이 살해됐다.
■이는 이후 작전의 사전 분위기 조성용이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500개 이상의 팔레스타인 마을과 도시들이 파괴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를 나크바(대재앙이라는 뜻의 아랍어)불렀다.
■팔레스타인인 1만 5천여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 중에는 수십 건의 학살도 있었다.
■시오니즘 운동은 팔레스타인의 78%를 점령했다. 나머지 22%는 지금의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다.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터전을 잃었다.
■오늘날 그들의 후손들은 팔레스타인 전역과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와 인접한 58개의 불결한 캠프에서 6백만 명이 난민으로 살고 있다.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건국을 발표했다.
■다음날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시작돼 1949년 1월에 끝났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 사이의 휴전이 성립됐다.
■1948년 12월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권리를 촉구하는 결의안 194호를 통과시켰다.
나크바 이후
■최소 1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관할지역에 남았지만, 그들이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기까지는 20년 동안 엄격히 통제되던 군사점령 하에서 살아야했다.
■이집트가 가자 지구를 떠안았고, 요르단은 1950년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대한 통치를 시작했다.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결성되었고, 1년 후 파타당(Fatah)이 창당됐다.
6일 전쟁(낙사, Naksa)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아랍 연합군과의 6일 전쟁 동안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 시리아 골란 고원, 이집트 시나이 반도 등 역사적인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했다.
■일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것은 두 번째 강제 이주, 즉 아랍어로 "뒤로 물러선"을 의미하는 낙사로 이어졌다.
■1967년 12월,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중 전선이 결성되었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좌파 단체들의 일련의 공격과 비행기 납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곤경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점령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정착촌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을 차별하고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또는 시민적 표현도 금지하는 군사적인 점령하에서 살아야 했던 반면, 이스라엘 시민으로서 모든 권리와 특권을 제공하지 않는 유대인 정착민들과 함께 2층 체제가 만들어졌다.
1차 인티파다 1987-1993
■1987년 12월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태운 승합차 2대와 충돌해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후 최초의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무장봉기)가 폭발했다.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이스라엘군 탱크와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등 시위는 요르단강 서안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 점령에 대항해 무장저항에 가담한 무슬림 형제단의 분파인 하마스 운동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스라엘군의 강경 대응은 이츠하크 라빈 당시 국방장관이 주창한 '골쇄정책'(Break their Bones policy)로 요약된다. 여기에는 즉결처형과 대학 폐쇄, 활동가 추방, 거주지 파괴 등이 포함됐다.
■인티파다는 주로 젊은이들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이는 이스라엘 점령을 끝내고 팔레스타인 독립을 확립하기 위해 헌신하는 팔레스타인 정파들의 연합인 통일국가지도부항쟁(UNLU)이 조종했다.
■1988년 아랍연맹은 PLO를 팔레스타인인들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했다.
■인티파다는 대중 동원, 대규모 시위, 시민 불복종, 조직화된 파업, 공동 협동조합 등이 특징이다.
■이스라엘 인권단체인 베첼렘(B'Tselem)에 따르면 인티파다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에 의해 사망한 팔레스타인인은 1070명으로 이 중 237명의 어린이가 포함돼 있다.
■17만 5천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체포됐다.
■인티파다는 또 국제 사회에 분쟁의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촉발했다.
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화염과 연기가 치솟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연합뉴스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 협정 서명과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받은 과도 정부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구성으로 막을 내렸다.
■PLO는 2국가 해결책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60%와 국토 및 수자원의 상당 부분을 이스라엘이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에 실질적으로 서명했다.
■PA는 동예루살렘에 수도를 두고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독립국가를 운영하는 팔레스타인 최초의 선출정부의 길을 걷도록 돼 있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PA 비판자들은 PA가 이스라엘에 반하는 정치 행동과 반대자들을 단속하는, 이스라엘 군대와 긴밀히 협력하는 이스라엘 점령군의 부패한 하청업자로 보고 있다.
■1995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주변에 전기 울타리와 콘크리트 벽을 설치해 갈라진 팔레스타인 영토 사이의 상호작용을 단절시켰다.
2차 인티파다
■2차 인티파다는 2000년 9월 28일 리쿠드 야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예루살렘 구시가지와 그 주변에 배치된 수천 명의 보안군과 함께 알아크사 사원 경내를 도발적으로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이스라엘군의 충돌로 이틀 동안 팔레스타인인 5명이 숨지고 200명이 다쳤다.
■이 사건은 광범위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2차 인티파다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경제와 사회 기반 시설에 전례 없는 피해를 입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통치를 받는 지역을 재점령하고 팔레스타인의 생활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분리 장벽 건설을 시작했다.
■정착촌은 국제법에 따라 불법이지만, 수년에 걸쳐 수십만 명의 유대인 정착민들이 빼앗은 팔레스타인 땅 위에 세운 식민지로 이주해 왔다. 정착민 전용 도로와 기반시설이 서안 점령 지구를 분할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공간이 줄어들고 있으며,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도시들과 마을들은 반투스탄(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만들어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분리 거주 지역)으로 전락했다.
■오슬로 협정이 체결될 당시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살았던 유대인 정착민들은 11만명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수용된 10만 헥타르(390 평방 마일)가 넘는 땅에 살고 있는 정착민들은 70만명을 넘었다.
팔레스타인 분할과 가자 지구 봉쇄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2004년 사망했고, 1년 뒤 2차 인티파다가 종식됐고, 가자지구의 이스라엘 정착촌은 해체됐고, 이스라엘 군인과 정착민 9천명이 이 지역을 떠났다.
■1년 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처음으로 총선에서 투표를 했다.
■하마스가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파타(Fatah)-하마스 내전이 몇 달 동안 계속되었고,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마스는 가자 지구에서 파타를 추방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주요 정당인 파타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를 재개했다.
■2007년 6월,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들로 비난하며 가자 지구에 육,공,해 봉쇄령을 내렸다.
가자지구에서의 전쟁
7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기습공격을 받은 이스라엘 남부 지역으로 이동 중인 이스라엘군 병사들의 모습. 연합뉴스 ■이스라엘은 2008년, 2012년, 2014년, 2021년 네 차례에 걸쳐 가자 지구에 장기간 군사 공격을 가했다. 수많은 어린이들을 포함해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만 채의 가옥과 학교 그리고 상업 건물들이 파괴됐다.
■봉쇄로 인해 철과 시멘트 같은 건설 자재들이 가자 지구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건은 거의 불가능했다.
■2008년의 공격은 독가스 같은 국제적으로 금지된 무기 사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2014년 이스라엘은 50여일에 걸쳐 민간인 1462명과 어린이 500여명을 포함해 2100여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다.
■이스라엘에 의해 '보호지 작전'이라고 부르는 이 공격으로 약 1만1천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부상당했고, 2만채의 가옥이 파괴됐으며, 5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