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원·박종민 기자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메시지가 예사롭지 않다. 태영건설 워크아웃과 관련한 태영그룹 측의 자체 정상화 방안(자구안)을 놓고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이 원장이 4일 등판했다. 이 원장은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사자성어까지 동원해 태영그룹의 무책임한 워크아웃 접근법에 쓴소리를 쏟아냈다.
산업은행 강석훈 회장 이어 이복현 금감원장도 작심 비판
고금리 지속과 건설경기 둔화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위험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도급순위 16위 중견기업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하지만 태영그룹은 지난 3일 열린 채권단 설명회에서 총수 일가 사재 출연이나 핵심 계열사인 SBS 지분 매각 등 실효성 있는 자구안을 내놓지 못했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 강석훈 회장도 채권단 설명회가 열린 직후인 3일 오후 "자구안을 제출하지 않고 '그냥 열심히 하겠다'라고 한 것만으로 상식적으로 채권단의 75%가 동의한다고 기대하기에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며 태영그룹 측의 전향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이런 가운데 이복현 원장이 태영그룹 측에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를 던졌다. 이 원장은 4일 열린 출입기자단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태영건설의 자구안이 채권단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 원장은 카메라 촬영이 허용된 공식 회견에서 모두발언을 통해 "금융당국도 워크아웃 신청 시 약속한 최소한의 자구책이 시작 직후부터 지켜지지 않고 있는 데에 대해서 우려와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어 "이와 관련해 정부 당국은 다양한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시장 안정을 위해 최우선 노력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오는 11일 태영건설 워크아웃 여부가 최종 결정될 예정인데, 태영그룹 측의 전향적인 자구안 마련이 없다면 워크아웃이 무산될 수 있고, 금융당국은 이를 대비해 시장 안정화 조치를 마련했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절제하면서도 압박…"대주주 일가 개인 명의 자금은 따로 파킹?"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카메라 촬영이 모두 끝나고 이어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
금융당국 수장으로서 이 원장은 표현을 최대한 절제했지만 압박 수위는 더욱 높였다. 이 원장은 "어제(3일) 윤세영 창업 회장도 말했지만 협력업체와 수분양자, 채권단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원하기로 한 제일 앞단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대신 총수 재산인 티와이홀딩스 지키기 아닌가"라고 포문을 열었다.
현행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 상 금융당국은 워크아웃 신청 기업에 자구안 수정을 요구하거나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인 채권자들에게 일방적인 양보를 요청하는 등의 직접 개입은 할 수 없다. 단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채권자와 채무자 간 신뢰에 기반한 협상을 지원하는 역할만 한다.
법률가 출신인 이 원장이 이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 원장은 "오너일가가 자회사를 통해 수백억, 수천억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구안에는 단 1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호황기에 태영은 시공과 시행을 한꺼번에 도맡아 하며 1조원 넘게 벌었고 상당 부분은 총수 일가에게 돌아갔다"고 언급했다. "태영측이 상당기간 자금 수주 계획을 진실성 있게 제시해야 한다", "오너 일가가 더 급한 다른 곳에 자금을 소진한 거 아니냐", "매각자금도 회장 개인 보유 자금과 회사 보유 자금 등 성격이 다른데 회사자금만 쓰고 대주주 일가 개인 명의 자금은 따로 '파킹'된 건 아닌가"라는 직설적 표현도 동원됐다.
태영건설이 협력업체들에 지급해야 할 상거래채권을 금융채로 분류해 지급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도 "핑계에 불과하다"고 일축했고, 전날 윤세영 창업 회장의 호소에는 "지금은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숫자에 기반한 이성의 문제다. 숫자에 대한 해답을 줘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태영건설 워크아웃 개시 여부가 결정되는 다음주 채권단협의회와 관련해서는 "시간이 있다고 오해하는데 11일이 지나도 이 이슈를 끌고갈 거라고 누군가가 기대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씀드린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현재는 수분양자와 협력업체가 피해를 떠안아야 하는 상황인데, 지난해 말에 나왔던 '견리망의'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견리망의(見利忘義)는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라는 뜻으로 지난해 대학교수들이 꼽은 올해의 사자성어다.
향후 건설사 '줄도산'에 나쁜 선례 남겨선 안 돼
태영건설 본사. 박종민 기자
앞서 태영그룹은 3일 열린 산업은행 주최 채권단 설명회에서 태영인더스트리 매각자금, 폐기물 처리 기업 에코비트 지분 매각, 골프장 운영 계열사 블루원 매각, 양곡화물 사업 기업 평택싸이로 지분 담보 제공 등을 통해 총 1조5000억~1조6000억원 규모의 유동성 공급 자구안을 제시했다. 자구안이 시장 기대에 못미친다는 질타가 이어지자 태영그룹 지주회사인 티와이홀딩스는 4일 윤석민 그룹 회장이 보유한 태영인더스트리 매각 대금 416억원과 자회사 채권 매입 30억원, 창업주 윤세영 회장의 자회사 채권 매입 38억원 등 총 484억원의 사재를 출연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채권단이 기대하고 있는 총수 일가 사재 출연 규모 3000억원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금융당국 수장인 이 원장이 직접 나서 태영그룹을 압박한 배경에는 시장의 기대와는 너무 거리가 있는 태영그룹 자구안에 일정정도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주채권 은행인 산업은행은 정책금융기관이어서 산은에 대한 금감원의 관리·감독 의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향후 부동산 PF 부실로 인한 건설사들의 '줄도산'이 현실화되면, 현재 태영그룹이 내놓은 자구안이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채권단의 워크아웃 승인은 일부 채무 변제와 상환 유예, 이자 감면 등 금융사 입장에서 일부 손실이 발생하는데, 경영판단을 잘못한 워크아웃 신청 기업이 책임있는 사재 출연과 '뼈를 깎는' 자체 구조조정 없이 금융사의 양보만 바라는 잘못된 관행이 자리잡을 수 있는 걸 경계한다는 얘기다.
특히 워크아웃이 무산되면 수백개에 달하는 협력업체 자금난은 물론 수분양자 피해도 막대하다며 워크아웃 신청기업이 이를 악용하는 도덕적 해이도 사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금융당국 판단도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자본시장연구원 황세운 연구위원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이번이 워크아웃의 마지막일 리는 없다. 또 나올 수 있다"며 "지금 태영그룹이 내놓은 자구안은 시장의 기대와 현저하게 차이가 있다"고 진단했다. 황 위원은 "너무 관대하게 받아주면 향후에 비슷한 상황이 또 발생할 때 금융당국이나 채권단이 제대로 대처가 안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