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5'를 포함한 주요 상급병원의 전공의들이 대거 사직한 20일 대한전공의협의회 임시 대의원 총회에 참석한 한 전공의가 의사가운을 입고 있다. 주보배 수습기자
"묻고 싶습니다. 피교육자인 전공의가 없다는 이유로 병원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작금의 병원 구조는 과연 바람직한가요? 이를 지금까지 방조했던 정부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건가요?"
서울 5대 대형병원인 '빅5'(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를 필두로 인턴·레지던트의 사직 행렬이 잇따른 지난 20일, 의사 가운을 입은 전공의들은 점심 무렵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의협) 회관 대강당에 속속 모였다.
의대정원 2천 명 증원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사직서를 내고 병원 현장을 떠나긴 했지만, 이후 어떤 방식으로 대정부 집단행동을 지속할 것인지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장장 5시간의 '마라톤 회의'가 이어지는 동안 다수의 전공의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환자를 남겨둔 채 떠난' 상황에 상당한 부담감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급병원 필수의료의 핵심인력인 자신들이 빠졌을 때 벌어질 상황을 알면서도 국민 생명을 '볼모'로 삼았다는 따가운 시선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을 '병원 밖'으로 이끈 결론이 달라지지는 않았다.회의 직후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았던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약 6시간 만에
"정부는 잘못된 정책을 철회하고 비민주적인 탄압을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박단 회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재선임하며 비대위 체제를 갖춘 전공의 단체가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를 재차 요구하면서 장외 투쟁이 본격화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21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전날 정오에 시작된 대전협의 임시 대의원 총회는 오후 4시 50분쯤 마무리됐다. 이 자리에는 전국 수련병원을 대표하는 전공의 대표 1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앞서 "돌아갈 생각 없다"며 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에 사직서를 낸 박 회장이 대의원회 의장으로서 긴급 소집한 자리다.
빅5 전공의 전원이 오전 6시를 기해 현장을 떠난 이날은 이른바 '의료 대란'이 본격화된 날이었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는 정부가 의사를 '집단 이기주의'의 화신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격앙된 반응과 함께 대통령이 강행 의지를 거듭 밝힌 의대 증원 방침을 비판하는 성토가 주류를 이룬 것으로 전해졌다.
총회 직후 논의 결과에 대한 언급을 꺼렸던 대전협은 전날 밤 11시쯤 대의원들의 총의를 모은 성명서를 내놨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 페이스북 캡처우선 대전협은 이달 초 정부가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와 의대 증원 정책을 묶어 "대한민국 의료체계 근간을 흔들 중차대한 정책이지만, 19쪽에 불과한 보건복지부 문서에는 피상적인 단어만 나열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고 혹평했다.
특히 집단행동의 직접적 계기가 된 의대 증원을 두고 "정부는 2천 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숫자를 발표했다"며 "과학적 근거를 요구했으나 정부는 근거자료 공개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그간 '합리적인 의사 수 추계를 위한 과학적인 근거 마련'이 우선임을 꾸준히 역설해 왔지만, 정부가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표심을 위해 급진적인 의대정원 정책을 발표했다"는 게 대전협의 입장이다.
정부가 의대 확대 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인용해온 서울대 홍윤철 교수의 연구보고서에 대해서는 "(저자인 홍 교수도) 문제가 많은 의료시스템을 고친 후 의대증원 규모를 계산해야 한다고 밝혔다"고 지적했다.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또한 '무리한 증원 규모'를 제출한 점을 시인한 바 있다고 짚었다.
해마다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 기피 현상이 심화하는 가운데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이 인력 유입을 유도하는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기존의 주장도 반복했다. 대전협은 "의대 증원은 필수의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국민들의 의료비 증가로 돌아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무엇보다 대전협은 전공의의 부재로 대한민국 의료가 '마비'되는 현 병원 구조는 정상이 아니라는 취지로 "지금까지 방조했던 정부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업무개시명령에 불복한 전공의들에 대한 '법적 조치'를 강조하며 엄정대응 방침을 내세우는 정부에 대한 반감도 강하게 드러냈다. 대전협은 "정부는 1만 5천 명의 전공의들 연락처를 사찰한 사실을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며
"사직서 수리 금지, 집단행동 교사 금지명령 등 초법적인 행정명령을 남발하며 전공의를 범죄자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전공의의 사직은 "정부의 횡포"에 따른 개별적 결정이라며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의사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이와 같은 초법적·비민주적 조치가 취해져서는 안 된다.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전협이
0순위로 요구한 사항은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의대 증원 계획 전면 백지화'다. 이와 함께 △과학적인 의사수급 추계를 위한 기구 설치 △수련병원 전문의 인력 채용 확대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 제시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업무개시명령 전면 폐지 및 정식 사과 등이 담겼다.
병원별 전공의 대표들은 "우리는 오로지 총선 승리만을 위한 의료정책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 무너지는 수련 환경 속에서도 병원을 떠나고 싶었던 전공의는 단 한 명도 없다"며 "밤을 지새우며 근무하면서도 환자들의 상태가 호전되는 모습에 기뻐하며 보람을 느꼈던 사람들"이라고 호소했다.
아울러 "이러한 방식으로 젊은 의사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하는 상황에 유감"이라며 "내일은 환자들의 곁을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20일 정오에 소집된 대한전공의협의회 긴급 임시 대의원 총회. 이날 회의는 약 100명이 참석한 가운데 5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주보배 수습기자이처럼
주요 수련병원의 전공의들이 집단행동의 정당성을 거듭 주장하면서, 의료계와 정부의 강대강 대치가 예상보다 더 장기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대전협은 앞으로 언제까지 진료거부를 이어갈지 구체적인 계획은 밝히지 않았다.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에 따르면, 지난 19일 오후 11시 기준으로 전체 전공의(약 1만 3천 명)의 95%가 근무하는 수련병원 100곳에서 사직서를 낸 전공의는 6415명에 이른다.
절반 이상(55%)의 전공의가 병원을 나가겠다고 선포한 셈이다.
정부가 앞서 발령한 집단사직서 수리금지 명령에 따라 수리된 사표는 없었지만, 사직서 제출자 4명 중 1명(25.4%·1630명)은 실제로 출근을 하지 않았다.
이에 19일부터 가동된 '의사 집단행동 피해신고·지원센터'에는 첫날에만 의료이용 불편 관련 상담이 100건 이상(103건) 빗발쳤다. 이 중 집단행동이 실제 건강 피해를 일으켰다고 신고한 사례는 34건으로, 대부분(27건)이 병원으로부터 수술 취소나 무기한 연기 통보를 받은 경우였다.
개중에는 1년 전 예약한 자녀의 수술을 앞두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입원 불가' 통보를 받은 부모도 있었다. 신고인은 수술 이후 회복까지 염두에 두고 보호자로서 간병을 위해 회사를 휴직한 상태인 것으로 파악됐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은 전날 브리핑에서 "정부는 이러한 피해사례를 검토해 환자의 치료에 공백이 없도록 신속히 지원하고, 필요할 경우 소송도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전공의들을 향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여러분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환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일은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하며 복귀를 압박했다.
한편, 전날 의협 회관에는 대전협 총회 도중 한 시민이 난입해 "국민이 죽든지 말든지 총파업해도 되는 거냐"며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20일 오전 서울 5대 대형병원인 '빅5'에 속하는 서울아산병원 응급실 입구에 '응급환자 수용불가'를 알리는 안내 팻말이 세워져 있다. 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