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환 해병대사령관(왼쪽),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연합뉴스채 상병 사망 수사 외압 의혹을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박정훈(대령) 전 해병대 수사단장을 동시에 소환했지만, 대질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공수처가 김 사령관과 박 대령을 동시에 소환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VIP 격노설'에 대한 대질 조사에 관심이 쏠렸지만 김 사령관 측이 거절하면서 성사되지는 못했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공수처는 전날 오전 김 사령관에 이어 오후에 박 대령을 차례로 불러 조사했다. 김 사령관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 피의자로, 박 대령은 고발인 신분으로 출석했다.
공수처는 김 사령관을 상대로 조서 열람 시간 등을 포함해 13시간이 넘도록 고강도 조사를 벌였다. 지난 4일 첫 소환 조사 당시 소화하지 못한 질문을 재구성해 A4용지 150~200쪽 분량을 준비했다.
공수처는 수사 외압 의혹의 단초로 꼽히는 'VIP(대통령) 격노설'을 두고 진술이 엇갈리는 박 대령과 김 사령관을 대질 조사도 염두에 뒀지만, 무산됐다.
김계환 "해병대에 상처" vs 박정훈 "진실 말하는 게 명예"
김 사령관 측은 "해병대가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해병대를 책임지고 있는 최고 지휘관과 부하가 대면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해병대에 더 큰 상처를 주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대질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전날 오후 11시30분쯤 조사를 마치고 나온 김 사령관은 '대질 조사를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지' 등을 묻는 취재진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준비된 차량을 이용해 청사를 빠져나갔다.
반면 박 대령 측은 "대질 신문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며 "오후 9시쯤 대질 조사를 시도했는데 김 사령관이 강력하게 거부해서 불발됐다. 사령관으로서 진실을 말하는 게 군 조직 보호와 해병대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밝혀 입장차를 보였다.
VIP 격노설은 박 전 단장이 지난해 수사자료를 경찰에 이첩하기 이틀 전인 7월 31일 윤석열 대통령이 채 상병 사망 사건에 대한 박 전 수사단장의 수사자료를 보고 받은 뒤 격노했다는 소문이다. VIP는 대통령을 일컫는 관가의 은어다.
박 대령은 김 사령관에게 'VIP 격노설'을 전해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채 상병 사망 수사 결과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결재한 지 하루 만에 사건 이첩 보류가 난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사실상 채 상병 사망 사건에 수사 외압 의혹의 발단인 셈이다. 하지만 김 사령관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해, 양측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앞서 공수처는 지난 20일 박경훈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 직무대리를 불러 조사했다. 그는 지난해 8월 해병대 수사단의 1차 조사 결과가 경찰로 이첩됐다가 회수된 이후 채 상병 사망 사건을 두 번째로 검토한 인물이다.
공수처 '오동운' 체제 출범
오동운 공수처장. 연합뉴스수사팀이 수사의 속도를 올리는 사이 공수처는 '오동운' 체제의 닻을 올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날 오동운 공수처장 임명안을 재가했다. 약 넉 달 동안 이어진 공수처 수장 공백 사태가 해소된 것이다.
오 처장은 지난 17일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채 상병 수사 외압 사건과 관련해 '일반론'을 전제하면서 윤 대통령의 소환 조사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 처장은 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외압 사건 관련 윤 대통령을 필요시 공수처에서 소환 조사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에 대해 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일반론으로는 의원님 의견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오 처장이 수사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지만,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하다. 공수처 수사력 부족 논란과 채 상병 사망 수사 외압 의혹을 비롯해 정치적으로 민감한 여러 사건을 중립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공수처는 이날 오후 오 처장 취임식을 연다. 오 처장이 공식적인 첫 출근길에서 입장 표명이나 취임 일성을 통해 채 상병 수사와 같은 주요 사건 처리 방향과 공수처 운영 방안 등을 내비칠 가능성도 있다.
'채 상병 특검'은 원점…다시 공수처의 시간
이런 가운데 윤 대통령이 이른바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공수처는 이번 사건을 수사할 시간을 더 벌게 됐다.
윤 대통령은 전날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채 상병 특검법 재의요구안을 재가했다. 법무부는 설명자료를 통해 "여야 합의 없이 (더불어민주당이) 강행 처리한 것으로 (특검) 후보 추천권을 민주당이 독점하게 해 대통령의 특검 임명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삼권분립 원칙에 위배된다"고 윤 대통령에 힘을 실어줬다.
윤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채 상병 특검법은 다시 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재의결을 해야 하는데, 가결 정족수가 197석이 돼야 한다. 재적의석이 295석이므로, 민주당과 무소속(9석) 의석을 다 합쳐도 180석에 불과해 21대 국회에서는 처리가 쉽지 않다.
결국 채 상병 특검법은 오는 30일 개원하는 22대 국회에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공수처로서는 특검이란 변수에서 벗어나 수사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다만 공수처 관계자는 채 상병 특검에 대한 윤 대통령 거부권 행사와 관련해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다"고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