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2일(현지시간)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과 벨트호벤 소재 ASML 본사에서 열린 한-네덜란드 첨단반도체 협력 협약식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네번째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윤 대통령,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 연합뉴스윤석열 대통령의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계기로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결정됐던 삼성전자-ASML의 협업 계획이 반년 만에 대폭 축소된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전자는 최첨단 반도체 양산에 필수적인 장비로 꼽히는 네덜란드 회사 ASML의 차세대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도입 계획을 애초안보다 대폭 축소했고, 이에 따라 양사의 국내 R&D센터 건립도 중단됐다.
이같은 조치가 삼성전자의 차세대 EUV 양산 기술 확보와 국내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린다.
반도체 기업들 줄서는 첨단 장비, 4대→2대로 계약 축소…1조 규모
연합뉴스19일 복수의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달 초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기업인 ASML 측에 차세대 하이(High) NA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도입 대수를 당초보다 축소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ASML은 EUV 노광장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네덜란드 기업이다. ASML이 독점 공급하는 EUV 노광장비를 활용하면 더 미세한 반도체를 만들 수 있어 주요 반도체 회사들은 장비 선구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하이 EUV NA 노광장비는 기존 EUV 장비에서 성능을 한 차례 더 끌어올린 장비로 미국 인텔이 'EXE:5000' 1차 물량을 싹쓸이하다시피 가져갔다. 삼성도 EXE:5000 한 대를 올해 안으로 들여올 예정이다.
쟁점은 'EXE:5000' 이후의 새 장비다. 삼성은 차기 버전인 △EXE:5200 △EXE:5400 △EXE:5600 등 3대 이상을 10년 동안 구입하겠다고 나섰다가, 지난달 초에 입장을 바꿨다. 삼성은 EXE:5200는 도입하겠지만 이후 버전 도입은 향후 재검토해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ASML 측에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차세대 장비 계약 규모가 최소 총 2대 줄어드는 것인데, 장비 대당 가격은 5천억 이상이어서 약 1조원 정도의 설비 투자를 되돌린 셈이된다.
이같은 결정은 전영현 부회장이 DS(디바이스솔루션) 구원투수로 선임된 이후, 진행중인 사업과 투자를 점검한 뒤 나온 조치로 알려졌다. 지난달 초 양사 최고경영진이 만난 자리에서 삼성전자는 이런 계획을 전달했고, 양사는 조만간 관련 계약을 변경하는 작업에 들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尹 "적극 지지·지원" 언급한 삼성-ASML R&D센터 건립 스톱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2일(현지시간)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과 벨트호벤 소재 ASML 본사에서 열린 한-네덜란드 첨단반도체 협력 협약식을 마친 뒤 박수 치고 있다. 왼쪽부터 윤 대통령,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 연합뉴스삼성전자가 차세대 하이 NA EUV 장비 도입 계획을 대거 수정하면서 삼성전자와 ASML이 함께 만들기로 했던 첨단반도체 공동연구소 건립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삼성전자와 ASML은 7억유로(우리 돈 약 1조원)를 투자해 수도권에 R&D센터를 건립하고, 차세대 노광장비 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는데 삼성전자가 하이 NA EUV 장비 도입 계획을 수정하면서 이 연구소 건립 논의도 일단은 스톱됐다.
상황을 잘 아는 한 업계 관계자는 "연구시설 건립을 위해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부지를 매입하고 이를 위한 설계와 인허가 과정이 진행되다가 삼성 측에서 장비 도입 축소 방침을 전해오면서 관련 과정은 전면 중단된 상황으로 알고 있다"이라며 "다른 공간에라도 공동연구소가 설립될지, 공동연구소 설립 자체가 무산될지 등은 향후 논의과정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양사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대통령의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계기로 ASML 본사에서 열린 한국-네덜란드 반도체 협력 협약식에서 수도권에 EUV 공동연구소 설립에 관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ASML 본사에서 열린 기업인 간담회에서 "한국과 네덜란드 반도체 동맹이 더욱 굳건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고, 올 1월 반도체 산업을 주제로 한 민생토론회에서도 ASML 본사를 방문했던 일을 전하며 "개방주의와 국제주의라는 게 과학과 산업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국제 공동 연구 지원을 재차 언급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도 윤 대통령과 국빈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며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순방 성과를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반도체가 거의 90%였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2일(현지시간) 벨트호벤 소재 ASML 본사에서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과 함께 찾아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의 안내로 '클린룸'을 둘러보기에 앞서 방진복을 착용하고 있다. 대통령실 홈페이지 캡처'하이 NA EUV 기술 우선권' 확보 등 삼성 사업 전략도 차질
전영현 부회장의 취임 후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전략도 일부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양사의 공동연구소 건립 MOU 체결 이후 삼성이 최첨단 메모리 개발에 필요한 차세대 EUV 양산 기술을 조기 확보하고 메모리 미세공정 혁신을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장비 도입 계획 축소 및 공동연구소 건립 스톱 등으로 EUV 기술 확보 로드맵이 수정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윤 대통령, 이 회장과 함께 네덜란드를 찾았던 당시 DS부문장 경계현 사장(현 미래사업기획단장, SAIT 원장)은 "이제 삼성이 '하이 NA EUV'에 대한 기술적인 우선권을 갖게 됐다"며 "장기적으로 D램이나 로직반도체에서 하이 NA EUV를 잘 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경 사장은 "공동 연구를 통해 삼성이 하이 NA EUV를 더 잘 쓸 수 있는 협력 관계를 맺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 "굉장히 튼튼한 우군을 확보했다"고 강조하기도 했었는데 당시 결정됐던 양사 협력 방향이 일부 수정된 것이다.
이번 결정은 국내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특히, 양사의 공동연구소는 국내 설비 소재 협력사 간 원활한 소통 등을 용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됐지만, 이대로라면 규모 축소가 불가피해 보인다.
반도체 산업을 잘 아는 한 업계 관계자는 "양사가 체결했던 계약대로라면 삼성전자가 최첨단 EUV 장비를 경쟁사보다 앞서 도입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EUV 최첨단 기술 개발과정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인데 계획이 수정되면 이런 가능성을 잃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ASML 하이 NA EUV 장비 도입 계획에 변동이 없다"며 "양사 R&D센터도 최적의 장소를 찾아 설립할 예정"이라고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