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7일 오전(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 말라카냥 대통령궁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한·필리핀 확대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한국과 필리핀이 지난 7일 정상회담을 갖고 외교 관계를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수교 75년 만에 양국 관계를 이렇게 공식화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필리핀은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뒤인 9월 19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참전했다. 총 7420명의 병력을 보냈고 116명의 필리핀 젊은이가 우리 땅에서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1987년부터 유통되던 필리핀의 500 페소(peso, 한국 돈으로 약 1만1800원) 짜리 지폐 뒷면 모습. 왼쪽 아래에 필리핀의 민주화 영웅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주니어 전 상원의원의 한국 전쟁 종군 기자 당시의 모습이 도안돼 있다. 아키노의 배경 그림은 '제1기병 38선 돌파'(1st Cav Knifes Through 38th Parallel)라는 제목으로 그가 마닐라 타임스(The Manila Times)에 쓴 한국전쟁 관련 기사다.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은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의 남편이자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의 선친이다.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에 항거하다 망명했으며, 1983년 귀국하다 공항에서 암살당했다. 이후 '피플스 파워'로 불리는 필리핀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됐고, 마르코스 독재정권은 결국 1986년 2월 붕괴됐다. 위키피디아 캡처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소위로 참전했고, 필리핀 민주화의 영웅 아키노 전 상원의원은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아키노 의원의 한국전쟁 종군기자 당시 사진은 1987년부터 약 30년 동안 필리핀의 500페소짜리 지폐에 실리기도 했다.
현재 필리핀의 인구는 1억 1584만 명이다. 베트남의 1억 98만명보다 더 많다. 한국과 필리핀이 이제야 전략 동반자 관계가 된 것이 의아할 정도다. 이번 양국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 관계는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9월 체결된 자유무역협정(FTA)도 발효를 앞두고 있고, 무기 판매와 인프라 투자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할 점이 있다. 양국 관계의 급진전에 우리 내부의 요인 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의 영향도 컸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전략경쟁이 우리를 필리핀과 가까워지게 만들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세력을 확장하고 한국의 핵심 동맹국인 미국이 이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한국과 필리핀의 협력 강화가 필요해진 것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90%가 역사적으로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016년 국제상설중재소(PCA)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중국은 무시하고 있다. 오히려 스프래틀리 제도를 중심으로 남중국해 곳곳의 암초(reef)와 모래톱(shoal)에 인공섬을 만들고 비행장과 미사일 기지를 구축하고 있다.
중국이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의 수비 암초(subi reef)에 구축한 인공섬. 지난 2016년 촬영된 위성 사진에는 암초 위에 활주로는 물론 군함의 접안 시설도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CSIS 홈페이지 캡처필리핀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 2016년부터 남중국해 문제에 온건하게 대응했다. 대가는 중국의 경제적 지원 약속이었다. 이때는 미국도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7년 트럼프 대통령 시기에 들어와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은 2020년 7월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은 완전히 불법"이라며 강도높게 비난했다. 필리핀도 두테르테에 이어 2022년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중국의 남중국해 영해 주장에 적극 대응으로 전략을 바꿨다.
지난 8월에는 중국과 필리핀의 해안경비대 함정이 남중국해의 사비나 모래톱(sabina shoal) 부근에서 충돌했다. 이 때 충격으로 필리핀 선박에는 직경 1m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이후 필리핀은 물러섰다. 하지만 중국 해안경비대와 민병대 선박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미국은 필리핀 해안경비대가 공격받으면 필리핀과의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남중국해를 핵심이익으로 규정한 중국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만약 남중국해가 통째로 중국의 지배로 넘어간다면 미국에게도 악몽이 될 것이다. 서태평양 전역의 해상 패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 미국은 항공모함을 앞세워 일본, 호주 등 동맹국 군함들과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펼치고 있다.
한국과 필리핀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바로 이런 시점에 맺어진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분야는 국방 및 안보 협력이다. 한국과 필리핀은 정상 공동 선언에서 "기존 국방협력 협정에 따른 양자 및 다자 차원의 연합 훈련에 참여"하기로 했다. 과거 양국이 맺은 국방협력 협정에도 군사협력 합의는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상 공동선언에 담겨 무게가 더 실리고 있다.
지난 2022년 10월 3일부터 13일까지 필리핀에서 열린 '카만닥(Kamandag) 2022' 훈련에 한국 해병대 1개 중대 병력이 참가했다. 카만닥 훈련은 미국과 필리핀 해병대가 2017년부터 실시하는 정례 훈련이지만 한국 군이 처음 합류했다. 한국 해병대 페이스북 캡처한국 군은 지난 2022년 10월 필리핀에서 열린 미국·필리핀의 '카만닥(Kamandag)' 합동 군사 훈련에 처음 참가했다. 당시 훈련 지역에는 남중국해에 접한 팔라완 섬도 포함됐었다. 우리나라는 해병대 1개 중대 병력 120명을 참관 자격으로 파견했다. 이번 한·필 정상 공동 선언을 계기로 미국 주도의 남중국해 군사 훈련에 우리 군의 참가 규모와 횟수가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일본,호주, 필리핀 해군 등과의 합동 훈련에도 참여할 지 주목된다.
미군이 주도하는 남중국해에서의 연합 훈련에는 일본·호주 뿐만 아니라, 유럽의 나토 주요 회원국들도 참가하고 있다. 영국은 물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도 남중국해에 항공모함을 포함한 군함을 보내 미군과 훈련을 하고 있다. 남중국해는 국제적인 분쟁지역이 됐다.
한국과 필리핀 정상은 이번 회담이 끝난 뒤 공동기자회견에서 "남중국해상에서 규칙에 기반한 해양 질서의 확립과 국제법 원칙에 따른 항행 및 상공 비행의 자유를 위해 계속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정상회담에서는 해양협력양해각서(MOU)도 체결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양국은 초국가적 범죄 대응, 정보 공유, 수색 및 구조 임무 수행 등에서 해상 안보 협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필리핀 매체 '필스타'(Philstar)는 지난 10일 "이번에 체결된 6개의 MOU 가운데 해양협력 MOU가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필리핀이 한국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수 있다.
우리나라 서해안에 중국 어선이 무단 진입해 불법 조업을 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22년 5월 4일 목포 해경이 우리측 배타적 경제수역(EEZ)에서 불법 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을 해상특수기동대를 투입해 추격 끝에 나포하는 모습. 중국 어선들은 도주하거나 해경의 단속에 흉기를 들고 저항하는 경우도 있어 단속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목포 해양경찰서 홈페이지 캡처우리나라도 서해에서 중국과 바다를 맞대고 있다. 우리 해역에서 불법 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들이 한국 해양경찰에 흉기를 들고 덤비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서해에는 한중 간에 분명한 경계선이 합의되지 않은 상태다. 남중국해의 필리핀 부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국 어선들과 어선을 가장한 해상 민병대, 그리고 해안경비대의 공격적 행태가 남의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필리핀과의 해상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남중국해 문제에서 필리핀 또는 미국·일본과 동일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우리와 지정학적 입장이 더더욱 다르다. 남중국해는 한국의 핵심적인 해상교통로다. 동시에 우리는 남중국해 문제의 한쪽 당사자인 중국과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고 북한 문제로 엮여 있는 것도 현실이다. 우리가 미국 주도로 남중국해 군사 훈련에 참가하더라도 중국에 대한 고려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남중국해 문제로 점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의 국익을 기준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지혜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