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1월 20일 재취임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미국 주요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2기에 미국에 또다시 민주주의의 위기가 올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진보 성향의 미국 MSNBC 방송은 한국 국회의 계엄령 저지 사례가 트럼프 당선인에 대한 경고가 될 수 있다고 논평을 했다. 단, 미국의 반트럼프 진영이 한국 시민과 야당처럼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연합뉴스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12·3 불법 계엄령 선포에 대해 초기부터 직설적으로 비판을 가했다. 오랜 동맹관계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국무부의 2인자인 커트 캠밸 (Kurt Campbell) 부장관은 한국의 계엄령을 '심각한 오판'(badly misjudge)이고 '불법적'(illegitimate)이라고 지적했다. 이른바 '아시아 차르'로 불리는 캠밸 부장관은 한국, 일본, 중국에 정통한 민주당 정부 최고의 아시아 전문가다.
바이든 행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 대해 이례적으로 단호하게 선긋기를 하고 있다. 사진은 내년 1월 20일 퇴임을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국무부의 베단트 파텔(Vedant Patel) 수석 부대변인도 계엄령 선포 당일 한국 정부로부터 사전 통지를 받지 못 했다며 선을 그었다. 이틀 뒤 브리핑에서는 사전 통지는 물론 미리 알지도 못했다며(had no knowledge or pre-notification) 연관성을 완전히 부인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예정됐던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의 한국 방문도 사실상 취소했다. 한미 핵협의그룹(NCG) 회의도 하루 전날 무기한 연기했다. 단지 말뿐이 아니라 즉각 외교적 대응 조치에까지 나선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한미 동맹 복원을 명분으로 바이든 행정부와 착착 보조를 맞춰 왔다. 특히 한미일 안보 협력, 우크라이나 지원 등에서 지나칠 정도로 미국을 따랐다. 미국 정부가 윤석열 대통령과 단호한 선긋기에 나선 것은 그래서 더 주목을 받는다.
미국의 이런 반응에는 국내 사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바이든 행정부는 다음달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2기 출범을 앞두고 폭풍전야 같은 처지다.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승리 4주 만에 내각의 주요 인선을 끝내고 정권을 넘겨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민주당 행정부가 지난 4년 동안 공들여 추진했던 동맹 중시 외교정책을 비롯해, 이민과 복지, 교육 정책 등은 철저하게 부정 당할 일만 남았다. 조 바이든 대통령 자신도 아들의 비리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 지지자들은 무엇보다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하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벼랑 끝으로 내몰릴 것이라며 불안해 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차남 헌터 바이든.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일 불법 총기 소지와 세금 관련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은 아들 헌터 바이든을 사면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8일 방영된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지시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법무장관이나 연방수사국장(FBI)가 결정할 것이라며 여전히 여지를 남겼다.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당선인은 헌터 바이든의 각종 비리 의혹에 대해 특별검사를 임명해 수사에 나서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연합뉴스이런 시점에 윤석열 정부가 무장 군인을 국회에 불법 난입시켰다는 황당한 뉴스가 워싱턴에 전해진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임기 내내 민주주의와 가치의 동맹을 내세우며 윤석열 정부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자신과 굳게 손을 잡았던 한국의 대통령이 독재자가 되기 위해 내란의 음모를 꾸민 '가짜 민주주의자'였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한국에서 발생한 민주주의의 역주행 사태가 바다 건너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비단 바이든 행정부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워싱턴포스트 신문(WP)은 지난 3일자 기사에서 미국에서도 한국의 계엄령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섞인 전망을 내놨다. 미국 헌법에는 계엄령 조항이 없다. 하지만 반란진압법(the Insurrection Act)의 발동, 반란이나 침략 상황에서 인신보호령 (habeas corpus)의 정지 등 다른 수단을 통해 계엄령 같은 상태를 만들수 있다는 것이 이 신문의 관측이다.
실제로 트럼프 전 대통령은 1기 재임 중이던 2020년 6월 반란진압법에 근거해 수도 워싱턴 DC에 군 병력을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당시는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지던 때였다. 하지만 마크 에스퍼(Mark Esper) 국방장관이 강력히 반대해 결국 군 투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 2기에서는 이런 견제를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장관들은 대부분 트럼프의 충성파들로 채워졌고, 상하 양원은 모두 공화당이 과반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은 무엇이든 일사천리로 집행될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신문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이 국내 문제에 군대를 투입하려 한다는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 신문은 지난달 6일자 기사에서 트럼프 당선인 측이 취임식 첫날부터 반란진압법을 발동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신의 재취임에 반대하는 시위가 거세게 벌어질 경우 이번에는 정말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겠다는 뜻이다.
뉴욕타임스 신문(NYT)도 지난 5일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프렌치(David French) 의 논평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반란진압법을 근거로 얼마든지 군대를 내정에 끌어들일 수 있다며 걱정했다. 이 법은 반란이나 국내 폭력, 불법적 결사나 음모를 진압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프렌치 칼럼니스트는 반란진압법의 규정이 허술해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인 지난 2020년 10월 미국 애리조나주의 멕시코 국경에 건설중인 장벽의 모습. 미국 뉴욕타임스 신문(NYT)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는 이민자의 대량 유입을 '침략'(invasion)으로 규정하고 군대를 동원해 대응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연합뉴스이 신문은 또 미국 헌법에 규정된 예외적인 '인신보호령의 정지' 조항이 악용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민자들이 국경을 넘어 계속 밀려들어올 경우 이것을 '침략(invasion)'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텍사스 주의 그렉 에봇(Gregg Abott) 주지사는 이민자의 '쇄도'를 '침략'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침략으로 인정되면 군사 작전이 정당화되면서 전쟁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NYT의 취재에 응한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국 헌법은 반란이나 침략의 상황에서 공공 안전에 필요할 경우 인신보호령의 정지를 허용하고 있다. 국경 방어를 명분으로 군이 민간인을 통제하고 체포와 구금을 하는 계엄령 같은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예상이 이래서 나온다.
미국 언론은 윤석열 대통령이 합법적인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것에도 주목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계엄군에게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급습하라고 지시한 것은 마치 '트럼프 대통령 흉내내기'처럼 보인다. 지난 2021년 1월 6일 대선에 패배한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의회로 몰려가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부정 선거라고 주장하며 시위대를 부추겼다.
지난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켰다. 미국 MSNBC 방송은 당시 미국 민주당의 느린 대응을 지적하면서 이번 한국의 12·3 계엄령 선포 당시 한국 시민과 야당이 보여준 신속하고 단호한 대응을 높이 평가했다. 연합뉴스난데없이 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은 무장 병력을 국회의사당 뿐 아니라 선관위에도 즉시 투입했다. 야당이 압승한 지난 4월 국회의원 총선의 부정을 의심하는 것이다. 야당은 물론 여당 지도자와 국회의원들을 체포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윤석열의 트럼프 따라하기가 한국에서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
진보적 성향의 미국 MSNBC 방송은 지난 5일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구했다"라는 제목으로 계엄령 선포 직후의 상황을 전했다. 이 방송은 시민들의 응원 속에 야당 의원들이 국회 의사당에 집결해 약 3시간 만에 계엄해제 요구 투표를 가결시킨 부분을 집중 조명했다. 지난 2021년 1월 트럼프 지지자들이 바이든의 당선이 무효라면서 의회에 난입했을 때와 정반대의 상황이다.
미국의 폭도들은 의사당에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경찰과 경비원들에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미국 민주당의 대응은 늦었다. MSNBC의 제임스 다우니(James Downie) 해설위원은 논평에서 트럼프에 대한 탄핵 조항을 도입하는 데만 5일이 걸렸다고 비판했다. 이후 표결에 다시 2일 이상이 걸렸고 탄핵 재판은 트럼프가 퇴임한 이후에나 겨우 시작됐다. 결국 선거 부정을 주장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4년 만에 백악관에 재입성하는 대역전극을 성공시켰다. 미국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상반된 결과를 비유하는 의미로 12월 3일이 '역(逆) 1월6일'(a reverse Jan. 6th)로 불린다고 한다.
지난 12월 3일 밤 기습적인 계엄령이 선포된 뒤 4일 새벽 국회 앞 모습. 이때는 이미 야당을 중심으로 한 재적 과반의 국회의원들이 경찰의 통제를 뚫고 본회의장에 입장을 한 상태였다. 연합뉴스MSNBC는 시민과 야당의 힘으로 계엄령을 무산시킨 한국이 미국인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트럼프에게는 경고가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단, 그럴려면 미국의 반트럼프 진영도 한국처럼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한국 상황은 미국인들에게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는 시민들 자신'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고 이 방송은 평가했다. 그리고 이 교훈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맞는 말이다. 계엄령으로 방아쇠가 당겨진 한국의 내란 상황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