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의 부푼 꿈을 안게 해준 대왕고래,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6일 동해 심해 석유·가스전 중 가장 크고 가능성이 높다고 본 대왕고래 유망구조를 시추한 결과 경제성이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급기야 산업부 고위공무원은 "1차 발표는 생각지 못한 정무적 영향이 개입됐다. 그때 발표에 대해 죄송하다"고 사과까지 했는데요.
이 관계자가 말한 정무적 영향은 뭘 의미할까요? 발단은 지난해 6월 3일 예고에 없던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에서 시작됐습니다. 취임 후 첫 국정브리핑이었는데 10분 전까지 대통령실이나 산업부 출입기자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원유 140억 배럴 정도의 막대한 양이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습니다. 산업부 장관은 한술 더 떠 이 매장량이 삼성전자 시총의 5배 수준이라고 밝혔는데요.
연합뉴스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로 알려진 대한민국에서 최대 4년 동안 쓸 수 있는 석유가 발견됐다고 하니 그 기대감에 며칠동안 석유, 가스 관련 주들은 상한가를 이어갔고요.
또 한편으로는 과연 믿을 수 있는 발표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논란은 미국 컨설팅 업체 '액트지오'의 세금체납, 1인 기업 등의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대로 된 검증이 맞냐'는 의구심을 샀습니다.
호주 석유개발업체 우드사이드사가 이미 동해심해가스전에 대해서는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해 철수했다는 내용들이 추가 공개되면서 경제성과 신뢰성 논란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대통령의 직접 발표로 정쟁화 된 대왕고래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연일 두드려 맞았습니다, 연말에는 첫 시추 사업 예산이 전액 삭감되는 수모도 겪었습니다.
발표 당시 전문가들은 시추도 해보기 전인데 탄성파로 관측한 탐사자원량만 가지고, 또 최대치인 140억 배럴이 마치 기정사실인 양 발표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정부도 20% 확률이라 했는데 석유 개발에서 20%는 높은 확률이라고는 하지만, 80%의 실패확률을 안고 있을 만큼 불확실성이 큰 사업입니다.
결국 시추 결과, 물론 6개의 유망구조가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우선 대왕고래 유망구조에 대해서는 경제성이 없다고 결론 내리고 시추공도 다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대왕고래 프로젝트라는 이름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습니다.
엄마, 나 이번 시험에서 100점 받을 거 같아. 라며 엄마의 기대를 잔뜩 부풀려 놓고, 먹고싶은거 다 먹고 게임 다 했는데.. 막상 성적표 받아보니 0점이었다 라고 하면 비유가 적절할까요?
실제 과거 사례들과 비교해도, 대통령의 발표는 설레발 그 자체였습니다. 지난 2005년 동해 석유·가스층 발견 당시에는 석유공사 차원의 보도자료가 전부였습니다. 발표 시점도 시추가 이뤄진 뒤였습니다.
1998년 동해 가스전에서 양질의 가스층이 발견됐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서지 않았고 이후 한 참 뒤인 2002년 동해 가스전의 생산시설 기공식이 열릴 때 참석해 힘을 실어주는 정도였습니다.
익명의 한 학계 관계자는 "10단계의 과정이 있다면 이제 1단계만 거친 상황인데 불확실성을 그대로 껴안은 상황에서 발표를 하는 건 다른 어떤 나라나 기업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무르익지 않은 완전 설익은 발표였다는 걸 꼬집은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발표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했다니, 그 부분이 가장 비판을 받는 지점입니다.
보통 대통령의 발표라고 하면 매우 신뢰할 만한 내용이라는 걸 의미하는데 이렇게 한없이 가벼운 발표였다니요. 국민들 역시 앞으로 가벼운 지도자의 말은 한번 걸러 들어야 한다는 걸 학습하는 계기가 됐을 겁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상황이 가장 안타까운 건 자원개발의 명맥이 끊어질까 하는 점입니다.
자원업계 관계자들은 발표 당시부터 지금까지 줄곧, 대통령의 성급한 발표에 대해서는 우려를 했습니다. 자원개발은 국가 자원안보나 에너지정책 측면에서 꼭 필요한 부분인데 이 문제가 정쟁화 하면서 자원개발 필요성이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실제로 한국석유공사는 대통령 발표와 무관하게 몇 해 전부터 동해심해가스전 개발 사업을 계속 진행해왔고, 대통령 발표 두달 전 시추선 계약도 다 돼 있었습니다.
석유공사의 시간표대로 해 오던 사업인데, 오히려 대통령 발표로 주목도가 높아지고 야당의 공세가 이어지면서 예산이 전액 깎이고, 이제는 이 사업을 계속 할 수 있을지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에 몰리게 됐습니다.
정권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자원 안보라는 대의를 생각하면 경제성과 확률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는 사안일텐데요. 한국은 에너지의 90%를 수입하는 국가입니다. 그만큼 에너지에 대한 수입의존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는데요. 비록 대왕고래의 경제성이 없다는 판단이 나왔더라도 자원개발, 석유탐사 중요성이 평가절하 돼서는 안 될 겁니다.
정부는 이번 시추를 통해 획득한 시료와 데이터는 나머지 6개 유망구조 후속 탐사에서 활용할 것이라고 밝히며 해외 석유 메이저 및 국내 기업 투자를 유치해 가스전 시추 사업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입니다.
8개월간 정치권의 몰매와 찬사를 동시에 받아 온 대왕고래,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입니다. 정무적 판단에 의해 불려나왔던 대왕고래를 이제 떠나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됐지만, 이번 일을 통해 자원개발에는 정치가 개입되면 안된다는 메시지는 제대로 심어준 계기가 됐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