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산 등 아름다운 계곡과 폭포를 품고 있는 35개의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충북 괴산. 증평 IC를 빠져나와 우암 송시열이 은거했다는 화양구곡(華陽九曲)을 향해 592번 국도를 따라 가다 보면 ''호산죽염된장 산채 한식당(www.ihosan.com)''이라는 간판을 내건 한옥이 나온다. 자그마한 체구에 편안한 미소를 띤 주인 이정임(58) 씨는 전통 된장을 만들어 파는 21년 관록의 된장 장수다. 그는 요즘도 ''손가락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정임 씨의 굵은 손마디와 거친 손은 그가 겪어온 파란만장한 세월을 웅변하고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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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하고 정갈한 맛의 된장찌개와 청국장찌개. 여기에다 돌산갓과 석이버섯, 고사리, 시금치나물, 토란나물, 가지 말랭이, 오이소박이, 동치미, 묵은지 등 23가지의 반찬. 그 뿐인가? 쌈을 싸먹으라고 다시마와 봄동(봄배추), 깻잎, 하루나, 쑥갓, 상추, 고추, 다시마 등 푸짐한 야채도 한 접시 가득이다.
모두 유기농으로 재배했단다. 밥에도 보리와 좁쌀, 기장, 팥 등이 고루 섞여 반들반들 윤이 난다.
함께 딸려 나오는 식혜와 숭늉 맛도 일품. 가격은 1인당 5000원이다. 맛 좋고 푸짐한 상차림에 가격까지 싸니 주말에는 식당 안에 빈자리가 없단다.
주인 이정임 씨에게 "이렇게 싸게 팔아서 장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여기는 본래 ''장(醬)''을 파는 곳이지 음식점이 아니에요. 우리 집 손님은 80%가량이 서울에서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을 사러 내려온 분들이죠. 멀리 괴산까지 ''장''을 사러 오신 분들께 감사의 뜻으로 공짜로 음식을 대접하는 겁니다. 어디서든 밥은 한 끼 드셔야 하니까요? 물론 장을 사지 않는 분들도 5000원 만 내면 푸짐한 시골 밥상을 받으실 수 있구요."
식당 뒤편에는 이 씨가 애지중지하는 장독들이 즐비하다. 모두 1700여 개나 된다. 아침 햇살을 받은 장독들이 유난히 빛이 난다.
이해인 수녀는 항아리를 ''삶의 시를 쓰는 존재''로 묘사한 적이 있다.
움직이지 않고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 우리집 항아리들/ 우리와 함께 바다를 내다보고 종소리를 들으며 삶의 시를 쓰는 항아리들/ 간장을 뜨면서 침묵의 세월이 키워준 겸손을 배우고/ 고추장을 뜨면서 맵게 깨어있는 지혜와 기쁨을 배우고/ 된장을 뜨면서 냄새 나는 기다림 속에 잘 익은 평화를 배우네/ 마음이 무겁고 삶이 아프거든 우리집 장독대로 오실래요? (이해인의 ''장독대에서'')
이 씨와 함께 뚜껑을 열고 차례대로 된장, 고추장, 간장의 맛을 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짜지 않았다. 맛이 깊고 그윽하다고 할까. 아무튼, 구수한 맛에 입안에는 금방 침이 고였다.
"우리 집 장은 모두 죽염으로 담근 거예요. 죽염과 된장, 간장 모두 항암효과가 아주 뛰어나죠. 그래서 특히 암을 앓고 있는 환자 가족들이 우리 집 장을 많이 찾아요. ''우리 집 장을 먹고 병세가 매우 호전됐다''며 고맙다는 인사도 많이 받죠. 어떤 분은 그래요. ''20년 묵은 우리 집 간장 한 스푼이 링거액 3병보다 낫다''고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좋은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욱 커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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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임 씨가 된장과 인연을 맺게 된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인천에서 잘 나가던 유통업자였다.
하지만, 1988년 친구에게 수표를 잘못 떼 줬다가 부도나는 바람에 빚쟁이들을 피해 젖먹이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부산으로 야반도주했다.
그때 나이 35살. 주머니에는 딸랑 1만 원짜리 7장이 전부였다. 그 뒤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막일하며 전국을 떠돌았고, 아내도 파출부로 일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스님이 이 씨 가족에게 절 방 한 칸을 내줬고 그는 그곳에서 어깨너머로 죽염으로 된장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그렇게 10년을 고생한 끝에 1997년 이곳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 땅에 정착했다. 그 사이 쌍둥이 아들도 태어났다. 그리고 토종 콩으로 죽염 된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지역신문에도 그의 사연이 소개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IMF 사태 여파로 귀농과 유기농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언론이 그를 성공한 귀농인으로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나라에서도 그를 ''신지식인''으로 선정해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도 쇄도했다.
죽염 된장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드디어 돈방석에 앉은 것이다.
"하루 매출이 어떤 날은 3000만 원이 넘었어요. 현금을 어디 둘 데가 없어서 정말 포대에 쓸어담았다니까요. 그리고 저녁에 은행지점장이 직접 와서 저금할 돈을 받아갔어요. 돈 잘 번다는 소문이 나서 된장 장사인 제가 두 번씩이나 세무조사를 받을 정도였어요."
장독대 위쪽 산기슭에는 황토로 지은 큼지막한 한옥 펜션이 자리 잡고 있다. 5~30평짜리 방이 모두 11개. 단체 손님을 위해 세미나실과 찜질방, 노래방 시설도 갖췄고 잔디가 깔린 축구장까지 딸렸다.
겉보기에는 근사해 보였지만, 이 씨는 후회가 밀려드는듯 씁쓸한 표정이었다. 큰 빚을 내 지은 이 한옥타운이 결국 큰 화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욕심이 화를 부른 거죠. 그때는 큰 빚을 내도 괜찮을 거로 생각했어요. 장사가 잘됐으니까요. 그런데 2005년이 되니 손님이 갑자기 크게 줄기 시작했어요. 경기도 좋지 않은데다 토속된장을 파는 곳도 그 사이 여기저기 너무 많이 생긴 때문이죠. 결국,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두 손 들고 말았죠."
잘 나가던 ''유통업자''에서 ''야반도주자''로 추락했던 그는 억척스럽게 된장을 만들어 팔아 한때 ''돈방석''에 앉았지만, 또다시 ''신용불량자''로 주저앉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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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이만한 ''롤러코스터 인생''도 흔치 않을 듯하다.
''신용불량자가 됐다''는 소식이 퍼지자, 평소 ''사장님'', ''형님'' 하며 따르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안면을 바꾸기 시작했다. 실의에 빠져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왜 한때 잘나갔던 연예인들이 인기가 떨어지면서 마약에 손을 대던가 자살을 하는지 그 마음을 충분히 알겠더라고요. 저도 후회와 번민으로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거든요. 그러던 중 제가 ''신지식인 강사''로 교도소에서 강연했던 일이 불현듯 떠오르는 거에요. 그때 제가 그랬거든요. ''아무리 힘들어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 그러니 절대 자살할 생각은 하지 마시라. 나를 봐라.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참고 견디니까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느냐.''고 말이죠. 결국 그때 그 이야기가 저 스스로한테 큰 위안이 됐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들한테도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었고요."
그는 지난해 9월 마음을 비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목표는 오직 하나, ''좋은 된장, 고추장, 간장''을 만드는 것이다.
요즘도 매일 새벽 3시 4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일과를 시작한다. 제일 먼저 뒷산에 올라 ''나는 반드시 해낸다''라고 큰소리로 3번씩 외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최근 이 씨의 장을 찾는 손님들도 다시 크게 늘었단다. 든든한 우군도 생겼다. 대학에 재학 중인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정임 씨와 함께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 식당 앞에는 돌로 만든 커다란 장승 2개가 서 있다.
그 옆에 있는 소나무 주변에는 크고 깃털이 멋진 토종닭들이 한가롭게 모이를 쪼고 있었다. 돌장승은 그가 한창 잘 나갈 때 8000만 원을 들여 산 것이다. 그 옆의 소나무 3그루도 가격이 2000만 원이다.
식당을 그럴듯하게 꾸미려고 거금 1억 원을 쌈짓돈 쓰듯 써버린 것이다. 그는 이것들을 볼 때마다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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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을 겪은 그에게 물었다. "실패를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첫 번째는 절대로 빚을 져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100원 벌면 100원 한도 내에서 살고, 1000원 벌면 1000원 한도 내에서 살아야지 욕심내서 빚을 지면 절대 안 됩니다. 사업이 잘될 때에는 계속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볼 때 경제상황이 어려워 우리 서민들이 올여름 나기가 무척 힘겨울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욕심부리지 말고 저축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인연을 맺는 모든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 때문에 많이도 힘들었지만, 실의에 빠진 나를 격려하고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결국 사람이었거든요. 어쨌든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니까 인심 넉넉하게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새삼 깨달았죠."
그때 식당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주인아저씨를 찾는 전화였다. 식당 안에는 점심을 먹으려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 씨가 통화를 끝내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강원도 철원에서 온 전화에요. 한 번 찾아갈 테니 죽염 된장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네요. 저는 언제든지 대환영이에요. 장을 직접 담그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죠. 장은 우리나라 전통음식의 가장 기초잖아요. 누구든지 전화(043-832-1388)만 미리 하고 오시면 돼요. 멀리서 오시는 분은 주무시고 가도 좋고요. 방은 많으니까."
이 씨는 ''자신처럼 인생의 쓴맛을 보고 재기를 꿈꾸는 남성들도 주저 말고 연락을 달라''고 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된장을 만들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것도 앞으로 인생살이에 큰 도움이 될 거란 이유에서다. 물론 숙식을 제공하고 월급도 준단다.
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아프고 삶이 무겁거든 우리집 장독대로 오실래요''라는 이해인 수녀의 시 구절이 다시 한 번 마음 짠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