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는 역사적인 기업이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종자돈으로 설립돼 한국 근대화의 초석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한 때 25%를 넘는 영업이익률로 외국에서도 탐을 내는 알토란같은 한국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포스코는 최근 몇 년간 침체를 거듭하며 그 위용을 잃고 있다. 경영 실적이 갈수록 하락하는데다, 정준양 회장의 사의 표명에서 확인된 것처럼 민간기업임에도 정권이 바뀌는 5년마다 수장도 함께 바뀌는 ‘CEO 리스크’가 반복되고 있다. 지금과 같은 구조라면 향후 5년 뒤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CBS 노컷뉴스는 포스코의 침체와 그 원인, 향후 방향을 진단하는 시간을 갖는다. [편집자 주]
정준양 회장. 자료사진
“B급 철강사 포스코”
포스코의 침체 국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스탠더드 앤 푸어스(S&P) 등 국제신용평가사는 지난해 10월 포스코의 신용등급을 A-에서 BBB+로 하향 조정했다.
상황은 올해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지난 5월 포스코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뚜렷한 성과가 없는 한 내년에 신용등급이 개선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포스코의 신용등급이 하락한다는 것은 곧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는 뜻이다.
시장의 신뢰를 잃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포스코의 영업이익률 하락과 부채 비율 증가 등 재무구조 악화에 있다.
그런데 한 꺼플 더 들어가면 경영 실적 악화를 야기한 원인이 바로 정치적인 요인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포스코 정준양 회장이 지난 15일 사의를 표명한 것에서 확인된 것처럼 포스코는 5년 단위로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수장도 함께 교체되는 ‘CEO 리스크’가 반복되고 있다.
김대중 정부 들어 김만제 회장이 유상부 회장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유상부 회장이 이구택 회장으로,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구택 회장이 정준양 회장으로 교체됐고, 박근혜 정부 역시 정준양 회장이 사의를 표명한 만큼 조만간 새 회장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포스코의 경우 비슷한 구조의 KT나 공기업과는 다소 다른 선출 양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정권 핵심이 대선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나 자신의 측근을 최고 경영자 자리에 꽂아주는 ‘단순 낙하산’이 아니라, 포스코 내부 인사를 정치권에서 밀어주는 이른바 ‘내부 낙하산’의 양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포스코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유상부 회장의 선출 과정에는 DJP 연합에 참여한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의 추천이 있었고, 노무현 정부에서 이구택 회장이 선출되는데도 박태준 유상부 두 사람의 추천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제철소 현장에서 일해 본 포스코 출신만이 포스코를 이끌 자격이 있다”는 포스코 순혈주의가 정치권력과 손을 잡고 경영권을 확보하는 방식인 셈이다.
포스코 내부 인사가 권력자의 낙점을 받는 양태는 이명박 정부 들어 더 큰 파열음을 내며 재현됐다.
검찰 수사 등 정부 압박으로 이구택 회장이 백기를 든 상황에서 정준양 당시 포스코 건설 사장이 경쟁자인 윤석만 포스코 사장을 제치고 회장으로 선출되는 데는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인 천신일 전 세중나모 회장, 친형 이상득 전 의원, 박영준 전 지경부 차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열린 최고경영자 후보 추천위원회에서 “(권력 실세로부터) 후보 사퇴 압력을 받았다”는 윤석만 사장의 폭로는 정권 실세의 개입이 근거가 없지 않음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이 같은 권력자의 추천 양태가 임기 내내 최고 경영자의 활동 영역을 제약한다는 점이다. 회장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권력에 빚을 진 셈이니 고비 고비 마다 정권과 호흡을 맞출 수밖에 없고 결국 무리한 경영으로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포스코 제공
대표적으로 정준양 회장이 10조원에 가까운 돈을 들인 해외 투자와 인수 합병을 들 수 있다.
“신성장 동력 확보와 사업 다각화라는 명분으로 시행됐지만 이명박 정부의 자원 외교에 부응하는 측면이 강했고, 그 결과는 수익 창출의 실패로 나타났다”는 것이 시장의 평가이다. 이명박 정권과의 커넥션 때문에 갖가지 불요불급한 사업에 헛돈을 썼다는 얘기이다.
재계 관계자는 “시장이 보기에 무리한 사업을 추진하는 만큼 전사적인 동의를 얻기 어려웠고, 이런 상황에서 추진 동력을 얻고자 하니 결국 정 회장 자신의 측근들을 골라 포스코와 계열사 주요 직책에 전면 배치하는 양상이 나타났다”며 “포스코의 위기는 정 회장 개인만이 아니라 그 체제를 구성한 공동 책임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준양 회장도 따지고 보면 ‘내부 낙하산’ 구조의 부메랑을 맞은 희생자라는 평가도 나온다.
5년 전 검찰 수사 등 이명박 정부의 압박으로 이구택 회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기회에 회장으로 선출됐지만, 정 회장 자신도 결국 박근혜 정부 들어 국세청 세무 조사 등 정부 압박으로 물러난 형국이 됐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는 최고 경영자의 경영 활동을 제약할 뿐만 아니라,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낙마하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연출함으로서 시장에 극심한 불확실성을 노출한다.
증권가의 한 애널리스트는 “최고 경영자가 외풍에 의해 임기를 채우지 못한다는 것은 경영 정책의 연속성이 흔들린다는 것이고, 그 만큼 포스코의 전도가 불투명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사실 정 회장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포스코의 본업인 철강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면서도 에너지와 소재 등 비철 분야의 개척을 통해 신성장 동력을 마련한다는 ‘비전 2020’계획의 지속적인 추진도 고비를 맞게 됐다. 정 회장이 포스코의 생존 방향에 대한 오랜 고민 끝에 마련했다는 장기 계획이 흔들리는 셈이다.
포스코 출신의 한 관계자는 “정치권이든 포스코 경영진이든, 포스코가 ‘대일청구권 자금’이라는 조상들의 ‘피 값’으로 설립됐다는 역사적 정체성을 인식한다면, 포스코가 직면한 문제를 방치할 수 없을 것”이라며 “5년마다 반복되는 악순화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