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윤성호 기자/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에 당선된 지 1년이 지난 19일,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잘 지냈냐고 묻기 전에 청년들이 먼저 우리에게 안부를 묻고 있다.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후문에 붙은 한 장의 대자보로 시작한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은 이제 전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 영국, 이탈리아, 말레이시아, 칠레 등 해외까지 퍼져가고 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 수십 개의 대학과 공공장소에 설치된 대자보는 이제 각계각층으로 퍼져 파업 중인 철도노동조합 김명환 위원장부터 변호사, 다산인권센터 노동자 등에게까지 이어졌다.
이토록 청년들이 서로의 안녕을 묻는 이유는 뭘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4학년 백상진(25) 씨는 지난 10일 겪었던 충격적인 경험을 들려줬다. 간식을 사러 가던 길에 갑자기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진 것.
백 씨는 "쓰러진 남성의 머리에서 피를 계속 쏟아지는데도 노숙인으로 보이는 남루한 행색에 때문인지 아무도 돕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며 "구급차가 와서 병원으로 갔는데도 노숙인 같은데 병원비나 있을까 싶어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쓰러진 사람의 머리에서 피가 몇 미터를 흘러도 아무도 돕지 않고 병원에 실려가도 치료비를 걱정해야 하는 우리 사회가 갑자기 잔인하게 느껴질 때 문제의 대자보를 봤다"고 말했다.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 김규백(23) 씨는 남들보다 늦게 가야 할 군대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박근혜 정권 들어 강경한 대북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군대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싶다"며 "군대생활도 걱정이지만 언제 북한과 부딪힐까 막연히 불안하다"고 고백했다.
학생들은 대부분 지난 1년 동안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김 씨는 "지난 이명박 정권과 같은 정당에서 나온 대통령 아니냐"며 "크게 달라진 것은 없고 대통령의 성향이 다른 수준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백 씨도 "민영화도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있던 얘기인데 박근혜 정권에만 책임을 묻는 건 모순"이라며 "솔직히 나같은 사람들은 국가기관이 대선에 개입했다는 거창한 얘기는 크게 와 닿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2차 '안녕들 하십니까' 성토대회를 기획한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3학년 정성인(24) 씨는 "달라진 게 있다면 늘 나빴던 상황이 이제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씨는 "취업경쟁만 해도 입학할 때에는 영어성적이 '취업 스펙'의 최고봉이었는데, 어느새 제2외국어는 물론이고 해외연수가 취업 준비의 기본이 됐다"며 "예전부터 취업이 어려웠다지만 정말 더 나빠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몰린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씨는 "비교적 취업하기 쉬운 학과라지만 공강 시간마다 벤치에 앉으면 참을 수 없는 갑갑함이 몰려든다"며 "취업과정은 물론이고 취업한 뒤에도 경쟁의 압박 때문에 자유롭고 다양한 가능성을 포기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생각을 하면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
또 지난 1년 동안 정치 국면을 달궜던 국가기관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해 김 씨는 자신이 3년째 사용한 트위터 계정을 비밀계정으로 바꾼 사연을 얘기하며 "이 정권에서 소설보다 더한 현실을 봤다"고 비꼬았다.
김 씨는 "대선쯤부터 사진 없이 기본 그림인 알 그림만 보이는 '알플필'들이 갑자기 늘어나더니 '전라디언이냐', '빨갱이다'라는 악성 트윗을 날려댔다"며 "국가기관이 대통령 선거에 동원돼 트위터나 게시판에 악성 글을 작성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웃었다.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계열 1학년 서재현(19) 씨도 "비정규직 문제나 정부에 대해 학생들이 비판하려다가도 서로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잘못되면 어떡하냐, 조심해서 수위를 낮추자'고 말한다"며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 1년이었다"고 말했다.
반값등록금 등 청년층을 겨냥했던 박근혜 정부의 약속에 대해서도 "기대한 적이 없어서 실망도 없다"며 냉소적이었다. 서 씨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믿어달라고만 하니 믿음을 줄 수 없는 정권"이라고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상황이지만 더 답답한 건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라는 답변도 있었다.
김 씨는 "박근혜 대통령은 뭘 물어도 그저 '잘하면 된다'는 식으로 넘겨버리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정권'이라는 인상"이라며 "언론에서 문제제기를 해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니 '우리를 무시하나' 싶다"고 답답해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안녕들 하십니까' 운동이 이제 안부를 묻는 것을 넘어서 남은 4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 운동을 시작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 주현우(27) 씨도 "이미 공은 제 손에서 떠났다"며 "아주 단순한 질문인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었고, 이제 대답이 오고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주 씨는 "1228개의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대자보로 받으려 한다"며 "저를 포함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 현상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주목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