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고려대 캠퍼스에 나붙은 대자보의 열기가 2주일 넘게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국민과의 소통 없이 지난 1년간 일방적으로 운영돼 온 국정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과 질책이 중단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2일 전격 감행된 민주노총에 대한 첫 공권력 투입만 보더라도 박근혜 정권은 그 같은 국민의 요구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의지는 이미 예고돼 있었던 것 같다.
16일 오전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정경대학 게시판과 담벼락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응답하는 대자보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윤성호 기자)
박 대통령은 19일 대선승리 1주년 자축행사에서 “우물을 팔 때 아흔아홉 길을 파도 나머지 한길을 포기하면 물을 만날 수 없다. 아흔아홉 길 팠던 것도 모두 허투루 된다. 기회가 왔을 때 더 열심히 일하자”고 말했다.
또 이 자리에 참석한 600여명의 새누리당 당직자들에게 “여러분을 보니 힘이 난다”고도 했다.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도 전날 “대통령이 국민 4800만명을 전부 청와대로 불러 밥 먹이는 게 소통이 아니다. 당연히 저항세력 입장에서는 불통이다. 그런 저항에 굽히지 않는 게 불통이라면 5년 내내 불통 소리를 듣겠다”며 ‘마이웨이’를 이미 천명한 바 있다.
결국 박근혜 정권은 현 시국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 국민들의 대자보에 철도노조 강제진압이라는 초강수로 응답한 셈이다.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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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공기업 개혁을 명분으로 국정주도의 고삐를 더 죄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 동안 만지면 커진다는 이유로 전략적으로 외면해 온 대자보 열풍을 잠재우는 여론 환기의 효과도 있어 보인다.
새누리당의 핵심 당직자는 최근 대자보 열풍에 대해 “우리가 신경 쓸 것도 아니고 부각시킬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대자보를 인터넷 댓글이나 SNS상의 글과 비슷한 성격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다.
“온라인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오프라인으로 확장하지 못하면 국민들이 인식하지 못한다.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는 대자보를 (우리가) 이야기하면 (대자보 붙이는 사람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만지면 만질수록 더 커진다”는 것이다.
다른 반응도 있었다.
새누리당의 한 초선의원은 “대자보의 파급효과가 크지 않다고 본다. 일부 언론이 이번 사안을 키우려고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묻힐 것”이라고 단언했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 역시 “대자보가 인구에 회자는 되고 있지만 아직 여론화까지는 분출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대자보 열풍에 대해 실제로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직 여론으로 분출되지 않고 있다’는 대목을 곱씹어 보면 이들의 인식이 편향적인 보수 언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여권의 전유물이라 할 만한 보수언론과 종편 등 주요 언론에서는 대자보 신드롬을 그렇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
성공회대 최진봉 교수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만 하더라도 종편 중심의 방송 매체가 본질보다는 비본질적 문제에 집중해 보도하는 행태를 반복해 왔다”며 “그러다 보니 사건 자체에 대한 보도 보다는 그를 둘러싼 논쟁이나 정쟁 위주로 보도하면서 국민들이 올바르게 인식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지금의 대한민국 언론 지형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 사안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결국 지금의 비정상적인 언론 지형이 여권의 오판을 낳고 그 것이 나중에는 여권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설명이다.
여권이 국정 운영에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박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아직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50~60%의 견고한 지지율을 유지해 왔다.
이는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등의 악재가 여론화되지 못한 상황과 상호작용을 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20일 공개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반대여론이 집권 처음으로 40%를 넘는 등 지지율이 급락 추세를 보이고 있어서 여권의 지금과 같은 상황 인식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