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김현정의>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는 풍속이 있다. "동지에 만들어 바치는 버선"이라는 뜻이다. 여인네들이 동지부터 섣달 그믐까지 부지런히 버선을 지어 시어머니나 시고모 등 시댁 어른들에게 선물로 올리는 풍속이다. 풍년을 빌고 다산(多産)을 빈다는 뜻으로 '풍정(豊呈)'이라고도 했다.
최근 현대자동차 공장 구내식당에서 동지헌말 양말 좌판이 진행되어 왔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가 사측으로부터 제기된 2백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소송을 감당하기 어려워 소송비용을 마련하고자 동지헌말 양말 판매에 나선 것이다.
한진중공업 노조도 최근 사측에게 59억 원을 물어주라는 판결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쌍용자동차 노조와 유성기업 노조가 각각 46억 원, 12억 원의 '손배 폭탄'을 맞았다.
최연혜 코레일 사장. (사진=윤성호 기자)
철도노조는 코레일 측으로부터 영업 손실 152억 원을 배상하라고 소송 당했다. 코레일 브랜드 이미지가 나빠졌다고 10억 원 위자료도 내라고 한다.
예전에는 경찰·검찰·정보기관의 물리력으로 노조를 억누르더니 이제는 돈의 힘으로 무릎을 꿇리는 것이다.
손해배상소송의 효과를 높이는 방법으로 손배가압류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하기도 한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고, 가해자 개인들과 가족을 포함한 신원보증인들에게 급여와 부동산까지 가압류 조치를 취하는 방법이다.
노조로서는 수십, 수백억 원의 배상액에 대해 소송비용만도 억대이니 감당이 어렵다. 재판을 포기하면 패소하는 것이니 배상금 폭탄이 떨어진다.
◈ 기관총 아니면 핵폭탄…죽기는 마찬가지1990년대만 해도 파업 주동자 고소 고발, 구속, 수배…이런 것들이 파업대책이었다. 손해배상 소송도 간간히 이뤄졌지만 노사가 타결을 지을 때 민형사상 책임과 소송을 취하하면서 악수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고 2000년 대 들어서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해 2002년 철도·발전·가스 공공부문 연대 파업 이후에는 청구 액수도 크게 늘고 손배가압류라는 압박이 선호되기 시작했다.
故 배달호 씨
2003년 1월 두산중공업 노동자 고 배달호 씨가 손배가압류에 항의해 분신하면서 손배가압류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임금, 퇴직금, 부동산을 압류당하고 현장에 복귀해서도 6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는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나서 곧 한진중공업 노동자 고 김주익 씨의 죽음이 이어졌고, 사회 여론이 나빠지자 손배가압류는 잠시 주춤했다. 가압류를 해도 최저임금은 보장하자 하고 사측도 평조합원에게나 신원보증인에게는 청구를 자제했다. 그때만 해도 돈을 가진 사용자 측이 돈 없는 노동자에게 돈 물어내라고 압박하는 것이 비신사적이라 여기는 양식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 2004년 '불법쟁의행위와 손해배상·가압류에 대한 연구'가 한국경영자총협회 부설 연구원에서 등장했고 손배가압류는 본격화됐다.
노조 간부뿐 아니라 평노조원, 가족, 신원보증인 등 가리지 않는다. 집 날리기 싫으면 알아서 남편을, 아빠를, 친구를 노조에서 탈퇴시키라는 연좌제 압박이다.
손배가압류는 노조를 압박하는 협상 카드에서 노조원을 노조에서 탈퇴 시키는 공격적 수단으로 바뀐 것이다.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해서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2007년 이랜드 노조파업 때 법원이 노조원 49명에게 54억 원의 가압류 조치를 승인했는데 이랜드 노동자들의 월급은 80만 원이었다.
(자료사진)
폭탄이 노조에게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앉아 쉴 곳도 없는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이 손배 청구를 당했다. 밀양송전탑 사태에서는 주민들에게 시공사의 손배소송이 투하되었다.
캄보디아 노동자 임금인상 시위에서도 손배소송이 등장할 모양이다. 유혈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외국 기업들로 구성된 봉제협회가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가난한 나라 피 흘린 노동자들에게 가혹하다는 국제적 비난을 사고 있는데 그 봉제협회에는 우리 기업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소송의 주체도 달라진다. 이제는 걸핏하면 국가기관이 손배소송을 들이댄다.
노무현 정부 때와 이명박 정부 때의 차이가 이것이다. 2009년 쌍용차 사태에서 정부가 경찰 치료비와 경찰 위자료 장비 손상에 대한 배상을 청구했다. 22억 원이다.
기업, 경찰 다 합치면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물리려하는 보상 액수는 가압류 포함해 281억 원이다. 가난과 좌절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병을 얻어 숨지는 사람이 이어지는데 돈 내고 죽으라는 건지는 몰라도 이건 아니다.
보다 못한 경기도의회 의원들이 법원에 탄원서를 냈다. 경기도의회 131명 제적의원 중 100명이 서명한 탄원서이다. 2011년 유성기업도 정부가 노조원에게 경찰 피해 및 장비손상비 1억1천만원을 청구했다.
2009년엔 철도 가스 발전 공공부문 쟁의와 관련해 국무총리실이 대책을 주도하면서 민형사상으로 고소고발하며 적극 대처하라고 독려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철도 노조에 100억 원대 손배소송과 가압류가 단행됐고 200명 해고, 1만3천명 징계가 이어졌던 것. 철도 해고노동자 허모 씨는 2011년 겨울 화장실에서 연탄불을 피우고 목숨을 끊었다. 노조로 인정도 못 받는 서러운 특수고용직 화물연대도 국가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노조원들이 가장 많이 흔들릴 때가 바로 회사 측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나설 때이다.
(사진=이미지비트 제공/자료사진)
◈ '법대로 하자'가 가장 흉포해국민의 세금으로 존재하고 임금을 받는 경찰 등 국가기관이 국민에게 손해배상을 물려야 하나? 이제부터 경찰을 상대하는 모든 국민 개개인은 경찰에게 공손히 머리 조아려 대해야 한다. 누구든 경찰에 손실을 입히면 소송일테니 말이다. 이런 것이 우리 사회에 서서히 번지고 있는 전체주의 경찰국가로의 전환 조짐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부른다. 법은 효과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헌법으로 노동3권을 보장하고 노동법으로 노동자에 대한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국가적 취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이렇게 적군을 깡그리 소탕하듯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것이 국격인가?
노조의 쟁의에 대처하는 것과 노조를 말살하려 하는 것은 다르다. 정부와 사법부가 이 정도를 구분 못하고 법의 취지를 이해 못하리라 생각지 않는다. 결국 뻔히 알면서도 법을 악용하는 것이고,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무책임함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이 말이 변하지 않는 진리임을 되새기며 분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