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에 입소한 지적장애 고등학생이 불과 일주일도 안돼 재차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학생은 심리치료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가 24시간가량 실종돼, 경찰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범죄에 노출된 뒤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건을 취재한 전북CBS가 베일에 가려진 보호시설의 실태를 점검해봤습니다. [편집자 주](관련기사: CBS노컷뉴스 19.3.14. [단독] 지적장애 고교생, 성폭력피해치료 중 방치돼 또 '성폭행')글 싣는 순서 |
① 시설 보호중 방치된 성폭력 피해자 '재차 성폭행' (계속) |
사진=자료사진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이하 보호시설)은 원치 않은 성 접촉으로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는 쉼터다. 특히 보호시설 이용자 중 94.6%가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일 만큼 취약계층 피해자에게 안전지대 같은 곳이다.
그런데 지난달 12일 전북 전주의 보호시설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입소한 지 일주일도 안 된 고등학생 A양(지적장애 2급)이 외부 기관에 심리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실종된 것이다. 치료 후 홀로 보호시설로 돌아가던 A양의 손에는 직원이 건네고 간 약도 한 장뿐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튿날 발견된 A양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문제가 된 시설 관계자들은 관리부실, 판단 착오 등 잘못이 크다며 고개를 숙였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21일 해당 시설에 인력을 파견하는 등 관계자들을 상대로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 사건의 발단, 특정 직원의 장애인 몰이해 탓일까성폭력피해자 보호시설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말로도 변명하기 어려운 중대한 과실이지만, 한편으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목소리가 높다.
노현진 전국성폭력보호시설협의회 대표는 “특히 장애인 입소자의 상태를 속단했다는 게 가장 뼈아프다”고 했다. 당시 보호시설 직원은 ‘혼자 돌아갈 수 있다’는 A양의 말을 믿고 동행하지 않았는데,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지적장애인 피해자를 지나치게 믿은 건 전문성 부족이 맞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보호시설 근무경력 11년차인 노 대표조차 여전히 장애인을 대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 노 대표는 과거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A양 사례와 마찬가지로 지적장애 2급인 고등학생 입소자가 사라졌다. 당시 시설 전용 휴대전화를 몰래 챙겨 나간 학생은 기차역에서 발견됐다. ‘기차를 타려고 했다’는 학생의 말에 노 대표 등 시설 직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장애인마다 성향이나 능력치가 다른 만큼 지식과 경험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장애인을 잘 돌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노 대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통합교육’ 이론에 동의하지만, 현재 보호시설 여건이나 종사자 개개인의 전문성, 장애인의 특수성 등을 고려할 때 장애인 피해자는 장애인 전용 시설에서 더 양질의 서비스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장애인 전용 시설은 일반 보호시설보다 피해자 입소 정원 당 직원이 한 명씩 더 많다. 현행법에 따라 시설 규모도 더 크고 보청기·휠체어 등 편의용품도 제공된다. 입소 가능한 최대 기간도 통상적으로 2배 이상 길다.
◇ 성폭력 피해자 10명 중 6명이 장애인…전문 보호시설 부족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시설 투자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 건 ‘A양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5년 성범죄로 시설이 폐쇄된 ‘전북판 도가니’ 자림원 사건 뒤 유사한 일이 있었다. 당시 자림원 시설장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 중 4명은 사건 직후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이 아닌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전북지부 산하의 일반 장애인보호시설로 급히 옮겨졌다.
새로운 보금자리 역시 이들의 쉼터로는 부적절했다. 피해자들은 새 시설에서 또 다른 성범죄를 목격했다. 2017년 시설 원장 자녀가 장애인들을 강제로 추행하거나 폭행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확충에 대한 목소리가 높은 이유는 또 있다. 여가부 ‘2018 성폭력 피해자 지원사업 운영실적 보고’에 따르면, 2017년 보호시설 입소자는 총 285명이다. 이중 장애인은 173명으로 전체 60.7%를 차지한다.
그러나 2019년 기준 전국 성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입소정원 369명(31개소) 중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전용 보호시설 입소 정원은 118명(9개소)으로, 전체 정원의 약 32%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장애인 성폭력피해자를 위한 자립지원공동생활시설이 생긴 것도 지난해가 처음이다.
지역별 불균형도 눈에 띈다. 장애인 전용 보호시설을 단 한 곳도 갖추지 못하거나, 턱없이 부족한 지역이 다수다. 서울, 인천, 대구, 경북, 울산, 경남, 강원, 전북, 세종 등이다. 수도권 내 장애인 전용 보호시설은 남양주에 단 한 곳 설치돼 있지만 그마저도 정원이 15명에 불과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