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 1 (18:15~19:55)
■ 방송일 : 2019년 4월 11일 (목요일)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김정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상덕 위원장 아들)
◇ 정관용>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딱 100주년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좀 특별한 분을 초대했는데요. 일본 동경에서의 2. 8 독립선언에도 참여하셨었고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해방 이후에 반민족특위특별위원회의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으셨던 김상덕 선생님. 그분의 친 아드님이십니다. 지금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계신데요. 김정륙 부회장님을 스튜디오에 직접 모셨습니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 김정륙> 안녕하세요.
◇ 정관용> 아버님 생각 많이 나시겠어요, 오늘.
◆ 김정륙> 우리 집에 아버지 영정을 모시고 있는 만큼 아침마다 제가 인사를 합니다. 아버지하고 어머니. 그래서 항상 생각이 납니다. 그립고요.
◇ 정관용> 아버님께서 바로 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도 맡으셨더라고요.
◆ 김정륙> 맞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일본에서 유학하셨고요. 유학 중에 바로 1919년 2. 8 독립선언에 참여하셨죠.
◆ 김정륙>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그다음에는 만주로 가서 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하셨나요?
◆ 김정륙> 네. 만주 독립운동 단체가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중에서 가장 세가 큰 독립운동단체가 세 곳인데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그중에 정의부에 아버지가 참여를 하게 됩니다.
◇ 정관용> 그리고 중경 임시정부 문화부장으로 계시다가 해방을 맡고 맞고 귀국하신 거예요. 우리 김정륙 선생님께서는 중국에서 태어나셨죠?
◆ 김정륙> 제가 중국 남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중국 수도였습니다. 남경이.
◇ 정관용> 몇 년에 태어나신 거예요?
◆ 김정륙> 1935년.
◇ 정관용> 35년. 그리고 아버님이 그렇게 독립운동 하고 계실 때 어린 시절이지만 혹시 기억이 나세요?
◆ 김정륙> 중경에서부터 기억이 납니다. 5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장면이 기억나거든요, 생생하게. 지금 제 손주들 보면 그 나이에 어떻게 그걸 기억하나 싶어요. 아마 충격의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 정관용> 어머님 돌아가시고 아버님은 같이 살지도 못하셨죠? 아버님은 며칠에 한 번씩이나 집에 오셨어요?
◆ 김정륙> 그리고 아버님은 한 달에 2번 정도 들어오셨어요. 중국 중경이라는 곳이 고온다습한 곳이거든요. 양자강하고 가능강을 끼고 있어서 항상 연무 같은 그런 게 끼고 그래서 음식이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임시정부로 들어갈 때 곡식 같은 걸 놔두면 문제는 간단한데.
◇ 정관용> 그런데 밥을 해 먹을 수가 없잖아요.
◆ 김정륙> 우리가 해 먹을 수가 없으니까 그게 안 되고 그래서 가장 오래 견딜 수 있는 음식이 따빙이라는 따빙이라는 빵입니다, 빵. 한 일주일 정도 잘하면 견딜 수 있어요. 아버지가 한 3일 정도는 우리 음식을 만들어주니까 되는데 나머지 한 5일이 빕니다. 그래서 이 5일 동안 제가 해결했어요.
◇ 정관용> 어떻게요?
◆ 김정륙> 우리가 중경에 가서 민족혁명단은 손가화원 이라는 곳에 정착을 했거든요. 거기에 민혁당 본부가 있습니다. 어느 역사 학자가 꽃 집이라고 역사책에다가 썼더라고요.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 김상덕 위원장 (자료사진)
◇ 정관용> 그런데 꽃집이 아니에요?
◆ 김정륙> 참 이 학자한테 연구비가 나올 텐데. . .
◇ 정관용> 손가화원은 손씨 성을 가진 사람의?
◆ 김정륙> 꽃밭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 정관용> 그럼 뭐가 있었어요?
◆ 김정륙> 거기는 작물단지가 굉장히 넓습니다. 복숭아, 사과, 무화과, 배 단지, 이렇게 단지별로 잘 되어 있어요. 거기에 숨어들어가서..
◇ 정관용> 서리해 오시는 군요?
◆ 김정륙> 실례를 하는 겁니다.
◇ 정관용> 알겠어요. 참 그렇게 7살, 5살 어린데도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지내셨다, 중국에서. 그렇죠? 그리고 광복을 맞고 아버님하고 같이 한국으로 돌아오신 거죠.
◆ 김정륙> 아버지가 먼저 들어오셨어요.
◇ 정관용> 그러셨어요.
◆ 김정륙> 아버지는 11월 23일 1진이 들어올 때 백범 김구 주석하고 김규식 박사하고 그 편에 같이 들어오시고 저희 가족은 3월 10일에 서울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고 아버지하고 연락이 닿아서 숙소로 들어간 곳이 바로 경교장입니다.
◇ 정관용> 경교장으로. 그리고 이제 아버님이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으셨는데 친일파들이 아버님을 해치려고 암살하려고 막 그랬었다면서요?
◆ 김정륙> 네 암살, 그래서 반민특위에서 아버지를 보호하는 경호팀을 뒀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경사 한 분, 순경 두 분이 칼빈총을 무장을 하고 집을 지켰습니다.
◇ 정관용> 그렇군요.
◆ 김정륙> 나중에 이승만 정권 그리고 친일파들이 굉장히 우리가 볼 때 바라지경입니다. 그 상태로 들어갈 때는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아버지가 하나 있는 아들 지키기 위해서 저 정릉 골짜기 안에 숨겼습니다. 그 당시 그리고 아버지도 종로1가에 연고가 있는 모처로 몸을 숨겼습니다.
◇ 정관용> 숨어다니셨군요.
◆ 김정륙>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수장이 친일파한테 쫓겨서 숨어다니는.. 이게 나라가 그 당시 그랬습니다.
◇ 정관용> 또 반민특위위원장으로 활동하시던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찾아왔었다면서요?
◆ 김정륙> 이 박사가 반민특위 활동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동을 겁니다. 친일 경찰 다 풀어줘라. 그리고 특위 활동을 자제해 달라 이겁니다. 고등계에 있었던 가장 악질적으로 친일 경찰활동을 했던 사람들. 우리 독립운동가를 잡아다가 갖은 고문, 고통을 줘서 죽음으로 몰아간 그런 사람들... 우선해서 잡아들이는데 풀어주라는 겁니다. 그걸 받아들이면 반민특위가 있을 의미가 없거든요. 국회도 그렇고 반민특위도 그렇고 그 무례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러자 이 대통령이 성명서를 냅니다. "반민특위가 무고한 양민을 잡아다 구타를 하고 불법 행위를 하고 있다." 이렇게 거짓 성명을 냅니다. 국민하고 이간질시키는 것이거든요. 그때 반민특위에서 해명 성명을 내요. "그런 사실이 없다." 그런데 그러든가 말든가 계속해서 음해성 성명을 내니까 김병노 대법원장이 도저히 이거 그냥 묵과할 수 없어서 정리를 합니다. "반민특위가 무고한 양민을 잡아다가 고문한 사실이 없고 특별법에 의거한 정당한 활동을 지금 하고 있다"
◇ 정관용> 대법원장이 딱 판정을 해 주셨군요.
◆ 김정륙> 그렇게 성명을 냈어요.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구선생 바로 뒤쪽에 서있는 인물이 김상덕 선생이다. (사진=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 정관용>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 안에 공산당, 빨갱이가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냥 강제침탈을 해 버려서 반민특위가 거의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 김정륙> 이 대통령 성명이 안 먹혀들어가니까 국민들이 바보가 아니잖아요. 이거 분별을 못 하겠어요? 생각을 바꿉니다. 49년 5월 말에 경무대에서 반민특위 관사로 은밀한 전화가 한 통 와요. 대통령이 저녁에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기다려달라. 그리고 조금 있으니까 경무대 경호팀들이 확 들이닥치면서 우리 경호실, 경호팀을 외곽으로 쫓아내버리고 안팎을 둘러싸버렸어요. 그때 굉장히 과잉한 액션을 취하더라고요, 사람들이. 그래서 우리 가족들이 그 당시 느낀 건 가족들을 겁박해서 아버지한테 은연 중에 압력을 넣는 걸로 우리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고 조금 있으니까 이런 사전작업을 하고 난 다음에 이 박사가 조용히 나타났어요. 응접실에서 밀담이 벌어졌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친일 경찰 전면 방면하고 반민특위 활동을 슬슬 하면서 시간 끌다가 특위활동 기간이 만료되면 내각에 들어오는 게 어떻겠느냐.
◇ 정관용> 장관 자리 주겠다고 회유를 했군요.
◆ 김정륙> 감투를 가지고 회유하러 온 겁니다.
◇ 정관용> 그런데 아버님은 그걸 거절하셨고.
◆ 김정륙> 바로 거절해 버렸죠. 그러니까 이 박사가 판단을 잘 못한 겁니다. 끝까지 항일독립운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그런 유혹에..
◇ 정관용> 넘어가지 않죠.
◆ 김정륙>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가 임시정부 요인급이 일제로 전향을 해 들어오면 호위호식이 보장되어 있었거든요. 임정 요인들이 그 길을 안 갔거든요. 풍찬노숙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런 유혹을 단번에 물리쳤죠.
◇ 정관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강제로 침탈당해서 반민특위는 없어져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반민특위가 없어지고 아버님이 혹시 우리 부회장님한테 특별히 하신 말씀 없으셨어요?
◆ 김정륙> 아버지는 과묵한 편이었어요. 집에 들어와서 굉장히 속상해 하셨죠. 그럼 가족들은 그걸 다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고통을 알죠.
◇ 정관용>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아버님이 납북 당하셨죠? 그 후에는 어떻게 사셨어요?
◆ 김정륙> 살 길이 막막했죠. 방황을 하게 되죠. 살 곳도 없고.
김정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상덕 위원장 아들) (사진=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제공)
◇ 정관용> 그래도 공부를 해서 사법시험을 보려고 하셨는데 그걸 못 보게 되셨다고요?
◆ 김정륙> 전혀 몰랐어요. 전혀 모르고 고시 준비하고 삼독덕을 마친 뒤에 첫 도전에 제가 들어갔어요. 서류가 호적등본하고 신원보증서, 관급 신원보증서가 있어야만 취직도 되고 응시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호적 떼러 갔더니 빨간줄이 그어 있더라고요. 연좌제에 걸려서 발행불가로 나오더라고요. 그때부터 좌절의 시간을 제가 겪었습니다.
◇ 정관용> 아버님은 북한에 끌려가셔서 무슨 북한 정권에서 무슨 요직을 맡았나요?
◆ 김정륙> 아니요.
◇ 정관용> 전혀 그런 것도 없는데 연좌제에 걸렸다고요?
◆ 김정륙> 전혀. 취직은 안 되고 기피업종은 취직서류 없어도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뒤지다 보니까 공사판 일용직. 공사판 일용직으로 들어갔습니다.
◇ 정관용> 고생 많으셨는데 아버님이 이 독립유공자로 대한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으신 게 1990년이 되어서야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늦게 가서야 왜 그렇게 훈장을 받으시게 됐죠?
◆ 김정륙> 아버지가 훈장을 받았다기보다 제가 훈장을 쟁취했다고 하는 게 나을 겁니다.
◇ 정관용> 끊임없이 요청하고 요청해서. 그렇군요. 아니,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약하시고 2. 8독립선언의 주역이셨고 그리고 중경 임시정부의 문화부장까지 지내셨고 그 전에는 임시정부의 의원도 지내셨고 게다가 반민특위 위원장까지 하셨는데 이 나라가 그 분한테 훈장 주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 김정륙> 납북인사에게는 서훈이 안 됐습니다. 제외시켰어요.
◇ 정관용> 얼마 전에 정치권에 나경원 원내대표 이런 사람이 반민특위 때문에 그때 국론분열이 있었다는 식으로 발언하고 막 그랬잖아요. 그런 뉴스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 김정륙> 기가 막히죠. 그리고 나경원 대표가 하는 말.. 계속 말을 바꾸지 않습니까? 역사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 같아요. 역사를 아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민특위가 제대로 못한 게 아니라 반민특위가 제대로 할 수 없게끔 이승만 정권하고 친일파들이 파괴시킨 겁니다.
◇ 정관용> 그리고 그 당시 반민특위 활동을 반대하던 친일파들도 반민특위가 활동하면 나라가 분열된다 그랬다면서요?
◆ 김정륙> 별소리 다 했습니다.
◇ 정관용> 그 논리랑 사실 비슷한 거 아닙니까?
◆ 김정륙> 저는 지금 나경원 의원이 하는 말이 더 심각하게 들립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지난 3월 14일 "해방 후에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을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일은 바 있다 (사진=윤창원기자)
◇ 정관용> 더 심각하다?
◆ 김정륙> 반민특위가 분열을 일으켰다고 단정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는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친일척결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경우가 다릅니다.
◇ 정관용> 그렇죠. 지금 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부회장을 맡고 계신데 중국에는 그래도 임시정부 청사들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임시정부 기념관조차 하나 없었어요. 이제 땅을 마련해서 이제부터 짓겠다고 하는데 감회가 어떠세요?
◆ 김정륙> 저희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숙원사업이었습니다. 지금 저희가 최대한 건립을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임시정부 기념관이 개관되는 그날이 몹시 기다려집니다.
◇ 정관용> 참 훌륭한 아버님을 두셨습니다마는 저희들이 못나서 우리 김정륙 부회장님 그 온갖 고생을 다 하시도록 만든 거 정말 제가 죄송스러운 마음밖에 안 듭니다. 오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정륙> 고맙습니다.
◇ 정관용>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정륙 부회장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 선생의 아드님이셨습니다.{RELNEWS: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