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이한형기자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공연계가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열리는 일부 공연에서도 배우들이 '임금체불'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배우들은 '프리랜서'로 취급받아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민사 재판을 통해 떼인 돈을 받아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다 배우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 현실이다. 그 사이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배우들은 연극계를 떠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배우들의 근로자성을 좀 더 폭넓게 인정해 '체당금'을 지급하는 등 '사각지대'를 줄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코로나19 이후 임금체불 늘어나지만…근로자 아니라며 정부 '제도 밖'31일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실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3년 간 예술인신문고 접수 현황'에 따르면 '수익 미지급' 사례는 올해 8월까지 총 153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145건, 지난해 124건을 이미 뛰어넘은 수치다.
일반 근로자가 임금체불을 당한 경우 '체당금'을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다. 체당금이란 임금체불 당한 근로자에게 정부가 사업주를 대신해 먼저 돈을 지급하는 제도를 말한다. 정부는 이후 사업주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돈을 받아낸다. 최대 1천만원까지 정부가 먼저 주는 '소액체당금' 제도 등이 있다.
하지만 배우들은 이 제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정부가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 '보잉보잉'에서 공연을 했지만 기획사로부터 임금을 9개월째 받지 못하고 있는 배우 A씨는 "노동청에 근로자로 인정받기 위해 많은걸 준비해 갔지만, 결국 안 된다고 하더라"면서 "회사처럼 규율이 있고 월급을 받는데도 배우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토로했다.
A씨에 따르면 연극 '보잉보잉'의 배우들은 일반 회사와 같이 임금을 월급 형태로 받았고, 취업규칙과 같은 공연장 안에서 지켜야 할 '생활 규칙'도 존재했다. 다만 대부분 연출가를 통한 '구두계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서면계약서 작성이 의무화돼 있지만, 여전히 구두계약 관행이 남아 있다고 한다.
A씨는 "배우라는 꿈을 위해서 하는 '재능기부'가 아닌 정해진 룰대로 열리는 '상업극'이었고, 연습도 감독이 원하는대로 진행이 됐다"며 "그럼에도 배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현재 해당 노동지청에서는 기획사를 상대로 출석 조사를 요청한 상태다. 다음 달 중순쯤까지 이에 응하지 않으면 '행정종결' 처리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만약 이대로 종결이 되면 배우들은 민사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벌써 9개월 째 임금이 밀렸지만 또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 사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배우들은 아예 공연계를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해당 기획사의 또 다른 공연 뮤지컬 '지저스'에 출연했다가 임금체불을 당했던 배우 B씨는 "코로나까지 닥치면서 방세도 못내 힘들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심지어 배우를 그만두겠다는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일부 배우들 근로자성 인정 받긴 했지만…14년 전 기준에 머물러 있는 정부배우가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 '친정엄마'의 참여 배우와 스태프 등 25명은 올해 초 정부로부터 근로자로 인정돼 '소액체당금'을 받았다. 당시 제작사 대표가 갑자기 잠적하면서 지역 공연이 잇따라 취소됐고, 임금체불이 발생했다.
'예술인 신문고' 등을 운영하며 임금체불 등을 당한 배우들의 법률상담 및 소송 등을 지원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당시 보도자료를 통해 "예술인 신문고를 통해 신고받은 사건 중 처음으로 소액체당금을 받는 것"이라고 밝혔다.
재단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당시 피해 예술인들은 재단 소속 노무사와 초기 상담과정부터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했고, 성북구노동권익센터와의 협업 등을 통해 결국 근로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며 "이후에도 점차 근로자성을 인정 받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배우들 대부분은 정부로부터 근로자성을 인정 받지 못한다. 정부가 10년도 더 된 대법원 판례를 기준으로 근로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의 김유경 노무사는 "여전히 정부는 2006년도 판례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조건 10개 중 몇 개 이상 해당하면 근로자' 라는 등 기계적으로 근로자가 맞냐 아니냐를 판단하고 있다"며 "다수의 근로자들이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최근 노동력을 제공하고 사업장에서 일하는 형태 자체가 과거처럼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고 기계적으로 정형화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대법원 판례에서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은 매우 올드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전국민 고용보험' 또한 취지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분들에 대해서는 최소한 실업급여와 같은 것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라며 "그래야 생계유지에 타격을 받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반면 정부는 기존 대법원 판례를 기준으로 근로자성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임금을 못 받으신 분들이 지방관서에 진정을 제기하고, 거기서 사건을 처리할 때 근로자인지 아닌지 대법원 판례를 보고 개별적으로 판단을 진행하고 있다"며 "배우들을 포함하는 등 임의로 확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전용기 의원은 "작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문체부 측에서 연구용역을 진행하려다 포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장 돈을 못 받는 예술인이 많이 늘었다. 예술인에 대한 인식도, 보호해야 할 필요성도 바뀐 만큼 체당금 지급에 대해 충분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며 "예술인 보호를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