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안나경 기자)
◇수능 모의고사 하루 앞둔 날, '끔찍한 손길' 시작됐다
2017년 11월 수능 모의고사를 하루 앞둔 날,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A(20)씨는 그날의 끔찍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처음으로 계부한테 성추행이 있던 날이었어요. 날짜를 기억할 수 있는 건 모의고사를 보기 바로 전날이었기 때문이었어요. 아저씨가 갑자기 그런 행위를 하는데 소리 지르거나 반항도 못하고 밀어낼 수밖에 없었어요. 난처한 상황이 될까봐, 엄마가 놀랄까봐 걱정되기도 했고 무서웠어요."
A씨가 초등학생 시절 친부모는 이혼을 했다. 어머니는 B(45)씨를 만났고 A씨가 중학생일 때 살림을 합치게 됐다. 어머니와 언니, A씨 세 모녀는 그렇게 B씨 집에서 살게 됐고 '한 가족'이 됐다.
A씨는 학창 시절부터 계부 B씨가 성희롱적인 발언들을 해왔다고 회상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은 현실이 됐다. 사건이 있고 다음 날 모의고사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시험은 그대로 망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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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 못한 A씨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은 뜻밖이었다.
"엄마랑 언니는 '실수로 술김에 그런게 아닐까'라고 했어요. 그리고 당장 우리 살고 있는 집도 아저씨 집이고, 너가 먹고 사고 쓰는 돈도 다 아저씨 돈이다. 당장 내년에 고등학교 3학년인데 대학 가는 것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아저씨 도움 없었으면 이만큼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이런 식으로 말했어요. 조금 참으라고 별일 아니라고. '집에 있을 때 반바지 짧은 거 입지 말고 긴바지 입고 조심해라'라고 하기도 했어요."
절망했던 A씨는 이후로 가족에게는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이 됐고 수능을 2주 앞두게 된 어느 날, A씨는 또 다시 피해자가 됐다.
"수능 전이니까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회사에서 회식을 갔는지 집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는데, 그날은 엄마보다 아저씨가 먼저 집에 들어온 거죠. 집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이번엔 성폭행을 시도했어요. 힘으로 저항한들, 소리친들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위기의 상황이던 그때, 엄마가 집에 들어왔다. 계부는 태연하게 옆에서 잠든 척을 했다. 어머니가 "왜 딸 방에 있느냐"고 묻자 계부는 "취해서 자고 있었나보다" 하고 거실로 빠져나갔다.
A씨는 점점 고립감과 절망감에 휩싸였다. 당장 수능을 봐야 하는 상황에서 의지할 곳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도 없었다. 참다 못해 주변 친구에게 피해 사실을 얘기했지만 마땅한 대책은 없었다.
우울한 인생, 암흑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혼자 설 수 있고 유일하게 빛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공부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수능을 임했고, 결국 국내 명문대에 입학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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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꿈꾸며 명문대 입학했지만…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기숙사에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독립성을 키우게 됐다. 국가장학금을 타고 과외로 생활비를 마련했다. 가족과는 연을 끊다시피 지냈다. 이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의 악몽과 우울증은 A씨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친구들은 웃으며 캠퍼스를 누비는데, '나는 왜 이리 비참할까'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가끔 연락오는 엄마와 다툼도 잦았지만, 걱정이 되고 그립기도 했다. 엄마는 "다 잊고 화해하자"고 했다. 언니는 결혼이라는 집안 행사를 앞두고 있었다. A씨는 흔들렸다. 코로나19로 기숙사도 문을 닫고 생활비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갈 데가 없었던 A씨는 다시 그 집으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하루하루 집에 가기 싫어 친구 집에 머물다 밤 늦게, 가족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간에 몰래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 또 다시 사건이 터졌다. 지난 7월 가족끼리 저녁을 함께 했던 날이다. 엄마가 좋아하던 가게인 집 앞 포장마차 가게에서 가족들은 같이 술을 마셨다. 스트레스에 지친 A씨는 의도치 않게 평소 주량을 조금 넘기게 됐다.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왔고 A씨는 방에 들어가 일찍 잠들었다. 계부와 엄마는 거실에서 술을 더 마시는 듯했다.
그리고 그날 자정, A씨는 이상한 기분에 잠시 눈을 떴다. 바로 앞에는 계부가 있었다.
항거불능 상태였던 A씨는 그대로 성폭행을 당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 밖에 안 들었어요. 그렇게 참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공부해서 대학까지 갔는데 왜 나를 이렇게 또 무너트리는 거지. 내 인생이 진짜 왜 이러지, 원망스러웠어요."
"그날이 있고 공부를 해도, 내가 이 와중에 공부를 하는게 정상이야?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는데도 너한테 이런 일이 있는데 물이 마시고 싶어? 배가 고픈건 당연한 건데도 지금 음식이 넘어가? 스스로에 대한, 사는 모든 것이 저에 대한 질타로 돌아오더라고요."
집을 다시 나온 A씨는 친구 집으로 향했다. 유서를 쓰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민했다. 친구는 A씨를 설득했고, 마음을 추스린 A씨는 결국 경찰 신고를 결심했다. 엄마와 언니가 걱정됐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소 사실을 안 엄마와 언니는 취하를 하라고 A씨를 강하게 설득했다. A씨는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A씨를 상담했던 한 전문가는 "일반적으로 피해를 입은 딸 편을 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은 하는데, 이런 사례를 상담하다 보면 엄마나 가족들이 가해자 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며 "당장 먹고 살 문제가 얽혀있고 가족이 깨지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수사를 하더라도 이런 문제 때문에 조사가 되다가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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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고소를 접수한 경찰은 수사 끝에 B씨를 체포했고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친족관계에의한강제추행‧친족관계에의한강간‧친족관계에의한준강간) 등 혐의로 9월 중순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구속송치했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 결과 혐의가 중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A씨에 대한 신변보호 등 피해자 보호조치도 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