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스포일러 주의
조금 어두우면서도 묵직하고, 때론 비판적이며 염세적이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전작들과 달리 '리코리쉬 피자'는 기존 스타일보다 느슨하지만 한 걸음씩 선명하고 밝게 청춘의 성장통과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고,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사랑에 빠진 소년 개리(쿠퍼 호프만)와 불안한 20대를 지나고 있는 알라나(알라나 하임). 둘은 1973년 어느 찬란한 여름날에 만나 청춘의 한복판을 향해 달려간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신작 '리코리쉬 피자'는 사랑에 빠진 소년 개리와 불안한 20대를 지나고 있는 알라나의 뜨거웠던 여름날을 그린 영화다. 작품은 감독의 유년 시절 기억과 제작자 개리 고츠먼의 실화를 바탕으로, 감독의 고향이자 전작들에서 꾸준하게 담아온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밸리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영화는 10대 소년 개리와 20대 청춘 알라나의 성장과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때로는 실수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엇갈릴 수도, 화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우리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법이고 개리와 알라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놓였기에 가능한 낙관주의와 이미 그 경계를 넘어 어른의 영역 안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청춘의 불안이 교차하는 '리코리쉬 피자'는 경계에 선 이들, 경계 너머 흔들리는 이들의 눈부신 성장과 청춘을 그린다.
모든 게 다 성공할 것 같은, 자신감 넘치는 10대 개리와 반대로 알라나는 꿈도 미래도 희망도 없는 20대다. 사실 둘은 모두 온전히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도 저도 아닌 지점에 놓여 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과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건 대척점에 놓인 듯 보이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은 상태란 의미다. 그런 점에서 개리와 알라나는 닮은꼴이다.
다른 듯 닮은 둘은 서로를 통해 다양한 상황에 놓이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끼며 점차 경계를 벗어나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알라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를 벗어나 어른의 영역에 들어선다. 하지만 개리와 달리 분명한 어른의 영역에 선 남성들은 알라나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상황과 생각에 맞춰 알라나를 끼워 넣을 뿐이다.
영화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자신의 삶을 분명하게 그려가고자 한 알라나지만, 어른도 아이도 아닌 개리와 달리 어른인 그들은 오히려 알라나를 그 자체로 보려 하지 않는다. 오직 개리만이 경계에 놓인 알라나를 분명하면서도 오롯이 봐준다. 이는 알라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개리와 알라나는 자신을 찾아가고, 각자가 서로에게 갖고 있던 감정도 선명해진다.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가로지르는 가장 큰 감정은 바로 '사랑'이다. 두 주인공은 제대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서로에게 언급하진 않지만, 내내 미묘하게 서로를 의식하고 행동한다. 이는 분명 사랑을 온 마음으로 체득한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개리와 알라나는 각자 경계에서의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온전히 품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엇갈린다. 여전히 불안하고 흔들리는 존재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을 확인한 두 주인공은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 '사랑'을 확인한다.
알라나와 개리가 서로를 향해 달려갔듯이 영화도 잘 짜인 이야기 라인을 따라가기보다는 그들이 걷고 달리고 주저앉고 다시 달리는 모습을 이리저리 비추면서 쫓아간다. 그렇기에 관객들 역시 알라나 주위 남성들이 그러했듯 우리의 해석을 끼워 맞춰 보려고 하지 말고 그저 그들의 발걸음, 그들의 모습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쫓아가면 된다.
구체적인 모습은 다를 테지만,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나온 그 시기를 겪고 있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본다. 이도 저도 아닌 경계에 놓인 채,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까 두려웠던 나의 지난날, 혹은 나의 오늘날을 겹쳐보는 것이다. 그리고 개리와 알라나처럼 '나'를 찾아 달려가면 될 것이란 희망을 품어보게 된다.
영화 '리코리쉬 피자'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보다 온건한 영화이면서도 PTA(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애칭)의 영화답게 '리코리쉬 피자'는 당대 미국 사회상과 비판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또한 감독 특유의 질감과 6070 명곡들로 가득한 영화는 당대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마치 영화는 씁쓸해 보이는 것 같아도 막상 삼키면 단, 감초 그 자체다. 그렇기에 사랑스럽고 밝게 빛나는 '리코리쉬 피자'를 보고 나면 나의 10대도, 20대도 다시 음미해 보면 감초처럼 단맛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영화의 등장인물 대다수가 실존 인물에 기반한 만큼 영화 속 모습과 실제 모습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숀 펜이 연기한 잭 홀든은 고(故) 윌리엄 홀든이며,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존 피터스는 실존 인물로 '슈퍼맨' 시리즈를 제작한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다. 영화 속에서 여자 친구로 언급되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역시 실존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알라나 역을 맡은 알라나 하임의 연기가 몹시 인상적이다. 스크린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흡인력 강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20대 청춘의 얼굴을 스크린에 그대로 재현해냈다.
134분 상영, 2월 16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 '리코리쉬 피자' 메인 포스터.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