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하신 박완서 선생은 어렸을 때 엄마의 쌈짓돈을 몰래 빼내 구멍가게에서 군것질을 하다가 눈깔사탕을 담아놓은 유리를 깨고 말았다. 그날 저녁 가게 주인은 선생의 엄마를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하지만 엄마는 선생에게 '쌈짓돈 빼낸 일'을 캐묻지 않았다. 그 후일담이다.
"그러나 만약 그때 엄마가 내 도벽을 알아내어 유난히 민감한 내 수치심이 보호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감하다는 건 깨어지기가 쉽다는 뜻도 된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가 되었을 것이다. 하여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없는 선악의 갈림길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그많던 싱아는…)
인간이란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모순된 존재이며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도 "이 지상에서 하느님께 속한 모든 것은 동시에 악마에게도 속할 수 있다"고 비슷한 얘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미친 듯이 등불을 흔들며 해안가를 어슬렁거리고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밤에, 길 잃은 배가 거친 파도에 휩싸여 헤맬 때, 이 사람은 구원자가 될 수 있다. 그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서 좋거나 나쁘지 않다. 오로지 어떤 행위가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그 행위를 좋게도 만들고 나쁘게도 만든다.
한 몸덩이 안에 있는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자아의 충돌로 선악의 갈림길에 서기도 하지만 사람은 때로 내가 통제 못하는 환경과 질서에 따라 천상과 지옥에 설 수도 있다. 내 안의 충돌 뿐아니라 환경과 뒤섞일 수도 있다.
김인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후보자. 황진환 기자역대로 인사 때마다 '참화'라며 논란이 지속된지라 새 정부 첫 내각 인선검증과 동떨어져 관조하고 싶었다. 깐깐한 인사원칙을 내세우며 이른바 7가지 인사원칙을 제시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인사 실망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인사는 '아빠 찬스' 논란이란 것이 점입가경이고 그 상상력의 끝이 어딘지 입을 못 다물게 한다. 정호영 복지 장관 후보자의 아들·딸 의대 편입학에 이은 교육수장 후보자 김인철 전 외대총장의 일가족 패키지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금 논란에 또 기함하게 된다. 정말이지 풀(full) 브라이트(bright) 하다.
수백, 수천만원도 아니고 수억대의 장학금을 일가족 4명이 10여년 간에 걸쳐 돌아가며 독점하다시피 해왔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사금고도 아니고 개인 장학재단도 아닌 곳에서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모두 인정해 봐도 그렇다. 또한 후보자 해명대로 "가족들은 기준과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선발됐다"는 말을 사실이라 믿어봐도 그렇다. 그래도 뒤끝은 남는다. 대학총장을 지내시고 대교협 회장을 지내신 후보자가 온가족이 돌아가며 꿀단지 같은 장학금을 슬기롭고 꼼꼼하게 다 챙겼어야 하는 건지 형언할 말이 없다.
세평 가운데 김인철 후보자에게 눈에 띄는 언론 평이 있다. 한 교육계 인사의 언급인데 "기브 앤드 테이크가 확실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라는 것이다. 김인철 마당발 인맥을 소개하며 경향신문 기사에 나온 얘기였다. 이 한 줄이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 박진 외교부 후보자는 한국외대로 석좌교수로,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은 형인 장제국 동서대 총장과 한국 대교협 집행부 인연으로, 김병준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장과는 외대 대학원 동문 등으로 인맥을 맺었다고 한다. 그의 품성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 생각되었다.
우리 사회의 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구루(Guru)를 뽑는 컨테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국민들은 이미 잘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장관 후보자가 사회 공동체에 끼칠 영향 정도는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분의 이력을 함부로 재단키는 어렵지만, 그리고 알려진 내용이 그 분의 전 이력은 아닐 것이지만, 온가족 장학금 논란은 후보자를 성공욕망의 포장지 속에 가두고 말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27일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 본관 앞에서 열린 '김인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 사퇴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국외대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원들이 관련 손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뉴욕타임즈>의 기명 칼럼리스트였던 데이비드 브룩스는 우리 안의 본성을 아담Ⅰ과 아담Ⅱ로 둘로 나눠 설명했다. 아담Ⅰ은 이력서에 담길 커리어를 추구하고 야망에 충실한 본성이며, 아담Ⅱ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내적 인격을 갖추고 싶은 본성으로 봤다. 그는 두 본성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작금의 사회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경제학 논리가 득세하고 잘나가는 커리어를 쌓는 방법에 골몰하도록 장려된다. 정직한 자기 직시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담론은 별로 없다. 또 과거와 달리 염치(廉恥)라는 것이 성공으로 달려가는 열차를 막아서는 일도 이제는 드문 시대가 되었다.
김 후보자가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 취임한다면 그 메시지가 무엇이 될까. 경쟁에서 이익을 추구하고 효용을 극대화 해야 한다는 것일까, 자신의 욕망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일까, 답은 자명하다. 전자라면 고쳐질 것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