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환 기자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1990년 12월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에 반대하며 외친 한마디입니다. 소위 '노무현 정신'이라는 것은 이 한마디에 모두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수에게 말할 기회를 법으로 보장하고, 원칙과 절차를 지키라는 것. '노무현 정신'이자, 민주주의의 대전제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요체라는 국회에서 '노무현 정신'은 반복적으로 무너져오고 있습니다. 특히 그를 계승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이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이 같은 상황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일명 '살라미 국회'를 추진하는 것도 서슴치 않죠. (※'살라미 국회'란 필리버스터 안건으로 올라온 법안은 다음 회기에 무조건 상정된다는 국회법을 오용해 사흘 단위로 회기를 잘게 쪼개는, 일종의 '꼼수'입니다)
민주당은 2019년 12월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을 통과시킬 때에도 '살라미 국회'를 열었습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정의당 등 소수당은 선거법 개정안을, 민주당은 공수처 설치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4+1(민주·바른미래당·대안신당·민주평화당·정의당) 협의체'까지 구성해서요. '4+1 협의체'는 '살라미 국회' 소집을 통해 자유한국당(국민의힘의 전신)의 필리버스터를 무력화시켰고, 공수처는 간신히 설치됐습니다.
지난 주말, 민주당은 또 '살라미 국회'를 재현했습니다. 현재 검찰에 남아있는 6대 범죄(경제·부패·공직자·선거·대형참사·방위사업)에 대한 수사권을 모두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한 '검수완박법(형사소송법·검찰청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서였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172석이라는 압도적 다수당이 된 민주당이 단독으로 '살라미 국회'를 열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아이러니한 건 2019년과 지난주 민주당이 당의 명운을 걸고 처리한 '검수완박법'은, 노 전 대통령을 검찰의 강압 수사로부터 지키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시작된 법이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을 꼼꼼이 살펴본 기자의 입장에서 이 개정안이 검찰의 막가파식 수사를 막고 우리 형사사법체계를 보다 진일보시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개정안을 살펴보면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게 원칙이라고 하지만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부작용들, 사법체계와의 충돌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법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서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검찰이 수사하지 못하게하려고 만든 법이냐는 의혹들이 터져 나오는 이유입니다. 민주당이 발의한 형사소송법 개정안 '원안'은 Ctrl+F(찾아바꾸기) 기능을 활용해 '검사'를 '사법경찰관'으로 바꾼 게 아니냐는 의심마저 나왔습니다. 경찰이 영장 청구를 할 수 있다는 조항까지 있어 민주당 마저 실수였다고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헌법은 영장청구권이 검사에게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백미는 검찰의 6대 범죄 수사권을 이양 받을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설치법에 대해서는 이번 '살라미 국회'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중수청 설치가 빠졌다는 것은 당장 검찰의 수사권이 사라진 뒤 검찰이 맡았던 수사는 누가 할 지조차 정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초 중수청은 법안 처리 후 1년 6개월 내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안에도 포함됐었지만, 최종 수정안에는 빠졌습니다.
국가기관을 설치해야 하는 법(제정법)인 만큼 개정안에 포함시킬 수 없는 법 체계상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검수완박'을 주도한 민주당 황운하 의원 주장대로 "6대 범죄 수사권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증발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국회의장의 중재안도, 최종 수정안도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면 우리 사법 체계가 선진화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검찰 수사권을 박탈부터 하고 보겠다는 것 아닐까요?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96회 국회(임시회) 1차 본회의에서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이라 불리는 검찰청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찬성 172 , 반대 3, 기권 2표로 가결되는 모습. 박종민 기자민주당 내부 메신저를 살짝 보더라도 검수완박을 주도한 강경파 의원들의 이 같은 속내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를 위해 강경파 의원 몇몇은 검찰청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본회의가 열리기 직전까지도 '원안' 통과를 고집했습니다. 국회의장 중재안이건, 최종 수정안이건 모두 파기하고 원안을 통과시키자는 겁니다. 원안은 검찰의 수사 범위를 '부패 범죄, 경제 범죄
중'으로 제한했지만, 최종 수정안은 '부패범죄, 경제범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해 수사 범위를 좀 더 넓혀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조차 중수청이 설치되기 전까지, 일시적인 수사권 유지에 불과합니다)
원안 통과를 고집하던 민주당 소속 강경파 A의원은 "선의의 대가가 모욕과 박해로 돌아왔다는 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교훈이고,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실패의 반복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노 전 대통령을 소환했습니다. 역시 강경파 B의원은 "명분 하나 들고 모든 실리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했습니다.
B의원이 말하는 실리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민주당에서도 인정해 온,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 변호사도 이번 '검수완박법'으로 서민과 사회적 약자는 더더욱 법적 구제를 받을 길이 요원해질 거라고 지적하고 있으니, 서민과 사회적 약자가 실리를 얻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민주당에 묻고 싶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민주당에 남기고 싶었던 교훈이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하고, 수적 우위를 앞세워 반대토론을 무력화하며, 법조계와 모든 유관기관의 이의 제기에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것인지요.
강경파 의원들의 성토를 듣던 민주당 온건파 C의원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C의원은 자문합니다. "누추해진 민주주의와 빈곤한 신뢰 위에 그 어떤 개혁이 바로 서겠느냐"고요. 참고로 그 개혁의 결과는 공수처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범 후 15개월 동안 직접 기소한 사건은 단 1건 뿐인데 통신 사찰 논란과 위법한 압수수색으로 신뢰가 땅에 떨어진 그 공(空)수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