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흉기난동 사건이 발생한 서울 관악구 신림역 4번 출구 인근에 폴리스라인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서울 관악구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 이후 일명 '묻지마 범죄'(이상동기 범죄)에 관한 시민들의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검찰 등 수사당국에는 관련 통계·사례를 관리하는 기준조차 없어 뚜렷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회에 대한 분노로 이상동기 범죄를 일으키는 '외로운 늑대'(자생적 테러리스트)형 범죄에 대해서는 범정부 차원에서 관련 사례를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상동기 범죄' '외로운 늑대' 말은 많지만…통계도 분석도 대책도 없어
그간 범행동기가 명확하지 않거나 범행에 필연적인 이유가 없는 등 불특정성이 두드러진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뭉뚱그려 부르면서 원인 분석이나 대책 마련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은 지난해 1월 19일 '묻지마 범죄'의 공식용어를 '이상동기 범죄'로 정하고, 체계적인 사례 분석과 대응책 마련을 담당하는 태스크포스(TF)를 꾸린 바 있다. 당시 경찰은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 내 사건 구분에 '이상동기 범죄' 확인란을 신설해 사례 관리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특별히 진척된 사항은 없다. 경찰청 관계자는 "이상동기 범죄가 개념 자체로 모호한 부분이 있어 공식 통계로 관리하고 있지는 않다"며 "내외부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나름대로 판단 기준을 가지고 분류해 나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이번 사건을 단순한 묻지마 범죄가 아닌, 사회적 분노로 시민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가하는 '외로운 늑대'라고 단정하며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장담했지만, 검찰도 관련 통계조차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2017년도 국정감사에 제출된 '묻지마 범죄 통계'는 단발성으로 수기로 취합된 비정형화된 통계"라며 "묻지마 범죄는 일반적인 죄명이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을 포괄적으로 드러낸 내용이라서 영역을 정하기 어렵다. 현재 전산으로 관리되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또 "검찰은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적절하게 엄정한 형벌을 처단받을 수 있도록 하는 부분에 치중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2017년 대검찰청이 내놓은 '폭력범죄 엄정 대처를 위한 사건처리기준 강화' 방안에는 불특정 다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죄'는 피해자와 합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특별가중요소로 취급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것이 그 예다.
'이상동기 범죄' 사례 전수조사 필요…유형별 대책 마련해야
이처럼 개념 정립이 어려운 '묻지마 범죄'로 뭉뚱그리기보다 개별 사례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승재현 박사는 "사리 분별력과 의사 결정력이 완전히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 범죄에는 동기가 있다. 그 동기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경찰이 이상동기 범죄라고 말하는 사건을 전수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강남역 살인사건, 강서구 피시(PC)방 살인사건, 최근 과외앱 살인사건까지 비슷한 범죄 유형의 사람들에 대한 생애사적 분석을 통해 공통된 원인을 찾아야 유형별 대책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수사기관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범죄자들의 공통점을 추출해 비교는 해볼 수 있지만, 이것을 범죄 예방 측면에서 관리한다는 접근은 자칫 인권침해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며 "단지 치안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 복지나 교육 등이 연결돼 복합적으로 접근할 문제 같다"고 제안했다.
"북핵보다 위험…범정부 협의체로 '테러' 준한 수준으로 대응해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불특정 일반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가해행위를 단순히 경찰·검찰 등 수사기관에만 예방 책임을 맡기기보다 범정부 협의체를 구성해 사실상 '테러'에 준하는 수준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건국대 경찰학과 이웅혁 교수는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은) 사실상 정치·종교·이데올로기적 구호만 없었을 뿐 자생 테러"라며 "(미국·일본의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외로운 늑대가 국내에도 상당히 문제 될 시기가 가까이 온 사전 신호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 기관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경찰·검찰·법무부·복지부·지자체 등 여러 기관이 참여한 범정부 협의체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북핵 문제 때문에 지금까지 사람이 사망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불만형 '외로운 늑대'들에 의해서 최근 몇 년 간 수십 명 이상 사망했다"며 "정부가 북핵 문제 못지않게 정책적 우선순위를 가져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사이코패스 검사 등은 자칫 흥미 위주로 소비될 우려가 있다"며 "미국처럼 대통령 직속 산하 위원회에서 사건 이면의 문제를 점검하고 여러 기관이 각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중장기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회 불만이 키운 '외로운 늑대'…국가가 미리 발굴해 관리 필요"
한편 외로운 늑대로 변모하기 이전인 '은둔형 외톨이' 단계에 처한 고립·은둔 청년을 국가가 미리 발굴해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점도 지적됐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무차별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범죄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차별·고립, 상대적 박탈감 등 사회구조적 문제와 연결된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되기 때문이다.
지난 5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는 19~34세 청년 중 3.1%였던 고립 청년의 비율이 코로나19 확산이 지속된 2021년에는 5.0%로 증가했다.
보고서는 "고립된 청년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시기를 지속한다면 중장년과 노년에도 고립된 생애를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한 개인의 전 생애에서 중장기적으로 고립이 심화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청년기에 선제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사연 김성아 부연구위원은 "청년 정책이 2020년 청년기본법 제정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양적으로는 확대돼왔지만, 고립·은둔 청년에 대한 공적 지원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라며 "이번 정부 들어서 고립·은둔 청년 대책이 국정과제에 포함됐다. 보건복지부에서 지난 주부터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복지부는 지난 17일부터 다음 달 말까지 고립‧은둔 청년에 대한 첫 전국단위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해당 조사는 전국 19~39세 청년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5천여 명을 조사하겠다는 목표다.
김 위원은 "이번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적인 근거를 마련해 재정을 갖추고 실질적인 지원 사업으로 발전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