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 달리(DALL·E)로 그린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모습. "이제 괜찮아졌나고요? 현장은 그냥 멘붕(멘탈붕괴)이에요.
올해 기초과학 쪽은 1800개 과제가 사라졌어요. 이게 내년에 또 깎이면 앞으로 연구할 수 있는 사람은 반 이상 줄 거에요. 이번에 (정부가 발표하면서) '연구 비효율이 있다', '나눠 먹기 식이다'해서 정책적인 방향을 위해 감수하고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고 하셨죠? 저희가 얘기하는 건 갑작스러운 지원 체계 변화로 인해 피폐화된 '지금 연구 현장'이에요. 올해는 반쯤 무너져서 버티고 있는데 이게 계속 가게 되면 연구생태계가 확 무너지겠죠. 그게 현재가 쌓인 미래가 될테고요. 작년 사태 터지고 1년을 얘기했는데 도돌이표가 됐네요. 작년 9월하고 똑같아요. "
올해보다 약 3조원 증가한 내년도 주요 R&D(연구개발) 예산이 확정됐다. 정부는 '역대급'이라고 칭했지만 올해가 '역대급'으로 깎여서 그렇지, 지난해 수준이다. 오경수 중앙대 교수(기초연구연합회 총무이사)에게 현장 상황을 물었다. 올해 예산 짤 때 난리가 났었던 데 반해 내년도 R&D 예산은 증가했으니 조금은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겠냐는 기대감이 있었다. 몇 마디 듣자마자 그 기대가 너무 컸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난해 과학기술계는 R&D 예산 파동으로 혼란 그 자체였다. 발단은 지난해 6월말 윤석열 대통령이 R&D 예산을 특정해 나눠 먹기 식은 안된다고 지시하면서다. 갑자기 예산안이 새롭게 책정됐다. 문제는 △법에서 정한 일정들이 무시됐다는 점과 △연구 현장과 소통하지 않은 채 밀어붙이기 식으로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됐다는 점이다.
R&D 예산의 책정은 생각보다 굉장히 촘촘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거의 전년도 말부터 계획이 시작된다. 이를테면 25년도 R&D 예산안을 짜기 위해 23년도 말부터 전문가들이 모여 계획대로 논의한 뒤 예산안을 짠다. 24년도 6월 말에 어느 정도 확정이 되면 기획재정부와 국회를 거치며 어느 정도의 증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큰 뼈대'가 완성된다. 이걸 보고 연구자들은 한 해의 계획을 세운다.
과학 정책의 생명은 그래서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이라고 한다. 내년에 '어떤 연구'를 하고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연구자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하나하나 계획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 같이 일 할 사람 있나, 없으면 연구 안하고 이럴 수가 없어서다. 지금 연구 현장에서 가장 두려워 하는 건 자신들과 소통 한 번 없이, 예정된 바 없이 지원 체계나 금액이 또다시 바뀌는 게 아니냐 하는 지점이다. 우리나라를 책임질 젊은 연구자들은 불안감으로 R&D를 중시하지 않는 우리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R&D 예산 파동이 남긴 가장 큰 상처다.
그러나 완벽한 정책 실패에 대해 책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정부와 대통령실은 세수가 부족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산을 역대급으로 늘렸다는 자화자찬만 했다. 예산 삭감의 원인으로 지목된 '나눠 먹기 식 예산'의 근거는 무엇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제대로 된 규명도 없었다. 연구 현장과의 소통을 소홀히 한 주무부처에 대한 책임도 따져 묻지 않았다. 이를 주도했던 조성경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1차관이 올해 초 물러났을 뿐이다.
이러한 책임 규명이 없다 보니 애꿎은 소액 과제 연구비만 사라졌다. 연구비 규모가 가장 적어 연구자들의 초기연구로 꼽히는 '생애 첫 연구'와 '기본연구'는 올해 전면 폐지됐다. 대신 지난해 2164억원이었던 '우수신진연구' 예산이 올해 2702억원 규모로 늘어났다. 젊은 연구자들은 우수신진연구에 몰려들었고, 지난해 1951명이던 지원자 수가 올해 4559명으로 늘어났다. 과학기술계에선 연구 과제 특성상 연구비 자체가 소액일 수 있는 부분인데도 이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액과제가 왜 나눠 먹기죠? 소액과제로도 훌륭한 연구를 할 수 있는데, 소액으로 제대로 연구에 쓰고 과학 발전시키고 이러면 칭찬 받을 만한 일 아닌가요?
과학 정책에선 '선택과 집중'이란 말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과학이란 분야는 너무나 넓은 분야고, 미래에는 어떤 기술이 우리의 삶과 생활에 영향을 주는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과학은 저변성과 보편성, 지속성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분야별 지원 체계, 커리어별 지원 체계가 있었는데 이걸 싹 다 없애고 단순화하는 건 분명 큰 문제가 될 겁니다. (오경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