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고등계 형사 노덕술. 독립운동가를 잔혹하게 고문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 일제의 '최악질 순사' 노덕술을 '자랑스런 울산인' 후보자로 올리다
울산시가 최근 <울산의 인물=""> 자료집 발간을 앞두고 공청회에서 '울산의 인물' 587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문제는 여기에 친일경찰의 대명사이자 고문기술자인 '노덕술'을 포함시켜 시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이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에 고등계 형사로 일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으며,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난 인물이다.
만약 반민특위가 정상적으로 운영됐다면 제일 먼저 사형이 집행됐을 것이다.
울산 장생포 출신인 노덕술은 21살에 순사교습소를 졸업한 뒤 경남 보안과 순사로 일본경찰에 들어갔다.
그는 경남지역의 여러 경찰서와 서울 종로, 인천, 개성경찰서와 평남 경찰부, 경기도경을 거치면서 사상범, 즉 항일투쟁을 벌였던 인물들을 주로 다뤘다.
말하자면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은 일제의 앞잡이인 셈이다.
그는 자신의 원래 업무 외의 사건에도 개입해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는데, 주로 물고문이나 구타 등 잔혹한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출감한 후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해방 후 당연히 노덕술은 반드시 처벌해야 할 친일파 1호로 지목돼,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됐다.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돼 법정에 들어서는 노덕술. (좌측 고개 돌린 사람)
◈ 건국 초기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노덕술 처단 문제'노덕술이 체포되자 전 국민이 환호했다.
여전히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친일경찰은 국민들의 공적 1위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대구폭동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던 민중 봉기의 요구사항에 꼭 빠지지 않은 것이 '친일경찰 처단'이었을까?
국민들은 친일경찰의 원조인 노덕술 체포를 시작으로 모든 친일경찰에 대한 단죄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했다.
가만히 있을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경찰들이 아니었다.
최근 공개된 국무회의 기록을 보면, 노덕술이 체포되자 나흘 후 이승만은 '정부가 보증'을 해서라도 노덕술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친일경찰의 최고위 후견인 이승만 대통령
이어 2월 11일에는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관계자를 법에 따라 처리하라고 시달했다.
이에 앞서 노덕술의 후견인인 장택상 전 수도경찰청장과 김태선 시경국장은 이승만을 찾아가 '뛰어난 고문기술자'인데다 좌익세력 색출에 남다른 기술을 갖춘 노덕술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강변했다.
이 세 사람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은 미군정 때 물러난 일본 경찰 수뇌부 자리에 친일경찰을 밀어넣어 이제는 친일파가 경찰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국군도 아직 창군 초창기여서 이승만 정권이 기댈 물리력은 경찰이 유일했다.
아래 도표를 보면 경찰 내부의 구성을 알 수 있다.
결국 경찰은 이승만의 비호 아래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를 때려부수고 수사관들을 체포해 무력화시켰다.
반민특위가 해체되자 노덕술은 감옥에서 풀려나 이번에는 헌병대로 들어간다.
당연히 여기서도 추악한 정치테러의 한 주역으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한다.
◈ 노덕술의 반민족적, 반인륜적인 행각의 속살사례 <1>
(사진=사회평론 제공)
일제가 막바지 발악을 하던 1941년 1월 7일.
이재유가 체포된 뒤 지하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이던 이관술이 저명한 국문학자인 김태준과 함께 체포된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하필이면 그를 취조하는 인물이 같은 울산 출신인 노덕술이었다.
노덕술은 수배 6년만에 검거한 이관술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한다.
민족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일제 경찰의 고문을 당해본 이들의 공통된 증언은 일본인 형사보다 조선인 형사가 더 지독하고 악랄했다는 것이다.
노덕술은 고춧물 먹이기는 물론, 전화기 고문으로 알려진 전기고문, 일명 비행기타기로 알려진 엄지손가락을 묶어 매달기 같은 전통적인 고문과 함께 상해 치상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구타를 가했다.
해방이 되자 이관술은 이번에는 '조선공산당 정판사 사건'에 휘말려 또다시 노덕술이 지휘하는 친일경찰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한다.
사례 <2>
1948년 1월 24일 미군정의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친일경찰의 후견인이었던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노덕술을 발탁하고 끝까지 보호했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박정근이라는 25살 청년이 검거됐는데, 노덕술의 지휘 아래 그를 고문하다가 29일 새벽 그를 죽게 만들었다.
노덕술은 곤봉으로 박성근의 머리를 무수히 난타했으며, 부하 김재곤과 박사일 등은 실신해버린 박성근을 3시간에 걸쳐 물고문을 했다고 한다.
이 청년이 죽자 노덕술은 당황했다.
궁리 끝에 2층에 있던 취조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저놈 잡아라~' 하고 외치며 뛰어나가 박성근이 감시 소홀로 도주한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는 시체를 한강으로 가져가 얼음구멍에 쳐넣었다.
이 사건도 뒤늦게 폭로되었지만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장택상은 노덕술 이하 이 사건을 담당한 형사 14명에게 특별상여금을 줬다고 한다.
<사례 3="">
반민특위 체포대는 노덕술의 애첩인 관훈동의 기생 김화옥을 통해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의 집에 숨어 있는 노덕술을 체포했다.
체포 당시 노덕술은 4명의 호위경관들을 거느리고 6정의 권총과 34만원의 거액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체포당하기 전에 노덕술은 다른 친일경찰들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사건은 백민태라는 테러리스트가 서울지검에 자수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백민태는 반민특위 간부 등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이들이 월북하려고 해 사살하려 했다는 음모를 고백하고, 친일경찰로부터 받은 권총과 수류탄, 암살대상자 명단을 제출했다.
박민태는 항일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민족주의자 성향이 강한 테러리스트였기에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자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 역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이 나오는 등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 노덕술의 쓸쓸한 말년...그가 전수한 고문수사가 6월 항쟁을 낳다군인으로 변신한 노덕술은 헌병 중령으로 서울 15범죄수사대장을 지내다 '이승만의 양자'라는 김창룡 육군 특무대장과 권력투쟁을 벌이다 구속되기도 했다.
그가 고향 울산 장생포를 찾은 것은 1960년 5대 총선을 앞두고였다.
61세의 나이로 울산 중구에 출마한 노덕술은 2000여표로 꼴찌를 차지했다.
자신이 좌익을 분쇄한 반공주의자라고 떠벌리고 다녔지만 그의 추악한 과거를 아는 고향 사람들은 모두 그를 외면했다.
이후 '서울에서 아름다운 기생과 살고 있다더라' '서울대병원서 죽었다더라' 하는 소문만 돌 뿐 그의 최후를 아는 사람은 없다.
노덕술은 갔어도 그가 후배들에게 전수한 일제 스타일의 '고문수사'는 여전히 횡행했다.
그러다 1987년 노덕술의 직계 후배들인 치안본부 5차장 박처언 등 5명이 박종철 군을 고문치사하면서 6월 항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또다른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구속되자 친일경찰이 남긴 씨앗이 얼마나 뿌리를 깊게 내렸는지를 전 국민 모두 실감하게 되었다.사례>울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