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기사와 무관함(자료사진)
체육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학연에 따른 특정 선수 밀어주기와 승부 조작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특히 국기(國技)인 태권도에서 이 같은 비리가 적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전국체전 고등부 서울시 대표선수 선발전에서 승부 조작을 지시한 혐의(업무방해)로 서울시태권도협회 전무 김모(45)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기술심의회 의장 김모(62) 씨와 심판위원장 노모(53) 씨, 태권도경호학과 교수 최모(48) 씨 등 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5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5월 지방대 태권도경호학과 교수인 최 씨는 고등학교 태권도 선수인 아들을 특기생으로 대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동문 후배인 모 중학교 태권도 감독 송모(45) 씨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특기생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전국대회 1·2위 입상 실적이 필요하지만, 최 씨 아들은 그런 실적 없었던 것.
최 씨 부탁을 받은 송 씨는 고등학교 동문인 서울시태권도협회 전무 김 씨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고 이에 김 씨는 기술심의회 의장 김 씨와 심판위원장 노 씨 등에게 승부 조작을 지시했다.
같은 달 28일 전국체전 고등부 서울시 대표 선수 선발 결승전에 주심으로 나선 최모(47) 씨는 최 교수 아들의 승리를 돕기 위해 상대편 선수인 전모(18세) 군에게 경고 8개를 남발했고 결국 앞서고 있던 전 군은 반칙패를 당했다.
특히 경기 종료 50초를 남기고 무려 6개의 경고가 전 군에게 쏟아졌다.
당시 억울함을 호소하던 전 군 아버지는 서울시태권도협회의 구태를 비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권도에 전자호구제가 도입된 이후 승부 조작은 특정 선수에게 경고를 남발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수사 의뢰를 받은 경찰은 올해 초 서울시태권도협회를 압수수색 했다.
이후 승부 조작에 관여한 협회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추궁해 지난해 대표선수 선발전에서 '특정 선수에게 유리한 판정을 하라'는 일명 '오더'가 내려졌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경찰은 평소 끈끈하게 뭉쳐 서로 편의를 봐주던 서울시태권도협회 관계자들 사이에서 금품이 오간 정황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아들을 이기게 해달라"고 청탁한 교수 최 씨는 경찰 조사에서 "태권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식과 제자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부탁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지인을 통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승부 조작에 가담한 협회 관계자는 "'오더'는 심판부위원장을 통해 심판에게 전달되며 주로 남녀 고등부 경기에 많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일당 6~8만 원 정도 받는 심판이 한번 눈 밖에 나면 심판으로 불러주지도 않고 어느 순간에 잘릴 수 있어 소신 있는 판정이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피해자 전 군은 "상대편 선수는 주니어 선발전에서 이긴 경험이 있어 자신이 있었는데 경기 마지막에 경고가 한꺼번에 쏟아져 당황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전 군은 또 "늦었지만, 승부 조작 사실이 밝혀져 다행"이라며 "돌아가신 아버지께 이 소식을 전하고 싶다"고 울먹였다.
서울시태권도협회 기술전문위 수석부의장으로 재직하다 사퇴한 오 모(태권도 공인 9단) 씨는 "제자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학연 등 끼리끼리 뭉치는 독특한 문화가 협회에 존재한다"며 "가장 중요한 선발전 같은 대회를 앞두고는 5,000만 원 이상의 돈이 오간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서울시태권도협회가 매년 상임 심판 100여 명을 선정하는데 심판위원장이 심판 배정권을 전적으로 행사하고 있다"며 "특정 시합에 특정 심판을 배정할 수 있도록 독점적으로 운영되는 구조적인 문제를 밝혀냈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승부 조작 사건과 별도로 서울시태권도협회를 운영하며 허위 활동 내역서를 작성하는 수법으로 임원 40여 명에게 협회비 11억여 원을 부당지급한 혐의(배임)로 전직 회장 임모(61) 씨도 함께 입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