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정태춘(사진='정태춘 박은옥' 사이트 화면 갈무리)
한국의 민주화 현장을 지키며 함께해 온 가수이자 투사인 정태춘이 100만 촛불의 거센 물결이 몰아친 서울 광화문 광장에 다시 섰다. 새 음반 작업은 물론 언론과의 접촉마저 끊고 지내던 그가, 대통령 박근혜와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 농단으로 분노한 시민들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정태춘은 12일 서울 광화문·시청 일대에서 100만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 문화제 무대에 올랐다. 87년 6월항쟁 세대인 50대 이상과 그 이후 학생운동을 이끈 40대를 중심으로 광장에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반면 "누구지?"라며 다소 의아해 하는 몇몇 젊은이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는 이날 무대에서 지난 1993년 발표한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 한 곡을 불렀다. 그리고 인사말 대신, 노래와 하나로 어우리진 내레이션을 통해 한국 사회에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던졌다.
23년 전 내놓은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가사는 섬뜩할 정도로 지금 우리네 모습과 닮아 있었다. 특히 곡 말미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라는 가사는 현재 시민들이 겪는 아픔과 희망을 오롯이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태춘은 노래에 앞서 전 내레이션을 통해 아래와 같이 전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선이 악을 물리치고 염치가 파렴치를 이길 수 있는 나라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언제나 조롱 당해 왔습니다. 거짓은 진실 앞에 고개 숙이고 많이 가진 자들은 못 가진 자들에게 미안해 해야 하지만,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민의가 헌법보다 우선해야 하고, 시민의 분노가 정치적 계산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언제나 좌절 당해 왔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 "다시는 괴롭힘 당하지도, 좌절 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12일 오후 촛불을 든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청광장을 가득 매우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곧이어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흘렀다.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우워… 워… 워우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워우워…우우 워우워…워우워…우우 워우워"
정태춘은 도입주에서의 좌절 담긴 메시지와 달리, 간주 내레이션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을 벌이는 시민들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당위를 설명했다.
"지금 우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 분노는 우리의 염치와 정의감, 자존심으로부터 나옵니다. 다시는 괴롭힘 당하지도, 좌절 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여기 내가 살고 있는 나라, 이름이 무엇인가!"다음은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2절 가사다.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 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훠이… 훠이… 훠이 훠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훠이… 훠이… 훠이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