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몸짓'은 칼 사피나의 가장 최근 저서로, 그간 천착해온 동물들이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결과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그는 코끼리가 사는 케냐 암보셀리 공원의 열악한 자연 속으로(1부), 인간에 의한 비극을 경험한 채 살아가는 늑대들이 있는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2부), 범고래가 헤엄치는 북서부 태평양의 수정 같은 물속(4부)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여기에 동물들 곁에서 그들의 작은 소리와 몸짓까지 놓치지 않고 관찰해온 연구자들이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까지 덤으로 들려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동물에게 보내왔던 우리의 어리석은 사랑 방식과 오해를 깨달으며, 세계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원제 ‘Beyond Words’를 직역하면 ‘(인간의) 언어 저편에’라고 할 수 있다. 왜 사피나는 ‘동물의 세계’라고 하지 않고 ‘언어 밖의 세계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언어 밖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피나는 자신이 동물 관찰을 시작할 때만 해도 동물이 인간과 얼마나 유사한 행동을 하는지 찾으려고 애썼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인간과 동물을 비교해서 동물에게 어떤 능력이 있고 없는지를 밝히는 일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래서 연구 방법과 시각을 바꿨다. 동물들의 소리와 몸짓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했고, 이런 기록을 해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동물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아 왔던 것이다. 실제로 동물들은 끊임없이 소리와 몸짓으로 자신의 감정과 인지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같은 그룹 안에서 의견을 모아야 할 때나 위험 신호를 알려야 할 때, 새로운 변화를 준비해야 할 때 그들은 소리 내고 움직인다. 심지어 곁에서 자신들을 돌봐주거나 관찰하는 인간들에게도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며 감정을 표현하는데 우리가 그중 일부밖에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이 책의 1부, 2부, 4부는 각 제목이 암시하듯 코끼리, 늑대, 범고래의 행동에 대한 관찰 기록지라고 할 수 있다. 코끼리가 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내는 소리와, 늑대의 울음소리(하울링), 각 범고래가 갖고 있는 자기만의 서명 휘파람 소리 등에 귀 기울이며 그것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피나가 동물을 만나고 기록하는 방식에 있어 무엇보다 뛰어난 점은, 동물들을 종 단위로 묶기보다 한 마리씩 바라보고 개별적으로 서술한다는 데 있다. 때로는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에멧, 펠리시티, 체리, 에코, 이클립스 등)이나 번호(21번, 06번, 820번 등)로 동물들을 호명하며 그들의 행동을 묘사한다. 사피나의 관찰 방식으로 동물을 보다 보면 그들이 각 개체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인간과 비교하거나 한 종으로 통칭할 수 없는 저마다의 개성과 특징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17년 2월 9일, 일본 와카야마 다이지에서 야생 돌고래 두 마리가 국내로 수입됐다가 그중 한 마리가 울산 장생포 고래생태체험관에 도착한 지 4일 만에 폐사했다. 사망 원인과 책임 주체를 두고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아직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터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동물들이 세계 곳곳의 수족관이나 동물원으로 이동하고 그곳에 갇히는 순간 받게 되는 스트레스와 그로 인해 짧아지는 수명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인간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거나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다. 동물에게도 마음이 있으며, 느끼고 생각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과학계 안에서도 동물의 행동 연구는 역사가 짧다. 사피나는 동물의 마음에 대해 묻고 연구하는 일 자체가 “금단의 열매”(10쪽)였다고 말한다. 종신 교수직에 있지 않으면 이 분야에 발을 딛지 말라고 흉악한 소문이 돈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책의 3부에서 사피나는 이러한 시각을 강하게 비판하는 데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다. 사피나가 동물의 행동을 분석할 때 인간을 기준점으로 삼는 방법론을 반대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인간과 동물이 동일한 뿌리에서 시작됐다는 믿는다. “고등학생 때는 알고 지냈지만 이후 멀어진 친구들과 비슷하다”(733쪽)고 비유하기도 한다. 인간과 동물은 모두 동일한 두뇌 구조를 갖고 있으며 동물들도 인간 세계가 분류해놓은 것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자기혐오’만은 예외로 본다)는 것이다. 코끼리 사회에서는 가모장들이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가족 분위기가 달라진다. 코끼리들이 늘 함께 있기를 좋아해 서로 만나면 몸을 맞댄 채 떨어지지 않으려는 반면 늑대들은 무리 안에서 지위를 얻으려고 싸우고 쫓겨나기를 반복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사례들도 많다. 바다 안개 속에 갇혀 길을 잃었을 때 범고래 무리의 안내를 받고 빠져나온 경험이나 먹이 훈련을 받아온 범고래가 나중에는 조련사를 속이는 일도 있다. '소리와 몸짓'에는 이 외에도 논리적이지 않고 믿을 수 없지만 사람들이 분명하게 경험한 사례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들은 동물들에게도 ‘마음’이 작동하며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느끼고 아파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칼 사피나 지음 | 김병화 옮김 | 돌베개 | 782쪽 | 3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