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사진)
수사권 조정논의를 앞두고 '인권경찰' 구현에 앞장서겠다던 경찰이 자발적으로 임의동행에 협조한 일반 시민에게 백지(白紙)서명을 강요하고 변호권까지 침해했다는 진정이 제기됐다.
◇ 임의동행 시민에게 백지 주고서 "서명해라"
40대 여성 A 씨는 지난달 28일 오후 8시 30분 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택시를 타고가다 운전기사와 요금관련 시비가 붙어 112에 신고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을 따라 임의동행 형식으로 파출소를 찾은 A 씨는 이제 일이 잘 해결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A 씨는 파출소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법무법인 천일 소속 노영희 변호사에게 도움을 받고자 전화를 걸었다. 파출소 이름을 몰랐던 A 씨는 경찰에게 파출소 이름을 물었지만 경찰은 어쩐 이유에선지 알려줄 수 없다며 버텼다. 결국 노 변호사는 스스로 파출소를 찾아가서야 A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사이 경찰은 A 씨에게 '임의동행 확인서'를 제시하며 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해당 확인서는 '사건 경위' 등 기재부분에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백지상태였다.
파출소에 오게 된 경위 등 각종 부분에 어떤 내용이 적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경찰이 무조건적인 서명을 요구했고 경황이 없었던 A 씨가 서명을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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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노 변호사는 경찰에게 "무슨 사유로 오게 됐는지 쓰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적고서 서명을 해야 하지 않냐"며 "백지 상태에서 서명을 하는 것이 맞느냐"고 항의했다.
노 변호사의 항의에 경찰은 무언가를 적은 뒤 나중에 조사할 테니 돌아가라고 통보했다. 이에 노 변호사와 A 씨는 "서명까지 한 상황에서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마저도 보여줄 수 없다며 다음에 조사하겠다며 맞섰다. 노 변호사는 "백지로 된 임의동행 확인서에 무조건적으로 서명을 하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내용을 봐야 하니 확인서를 달라고 했지만 경찰은 슬쩍 확인서를 주고는 곧바로 회수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업무방해 운운하며 변호권 침해백지서명 뿐만 당시 경찰은 담당경찰관의 이름도 밝히지 않는 등 A 씨의 변호권까지 침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변호사는 임의동행을 요구한 담당 경찰의 이름을 물었으나 담당 파출소직원들은 '왜 이름을 알려줘야 하느냐'며 이를 거부했다.
이에 노 변호사가 "제복을 입고 근무하는 경찰인데다 당사자가 담당경찰의 이름은 당연히 알아야하는 것 아니냐"며 항의하자 한 경찰관은 "여기에 왜 들어왔느냐, 당신은 들어올 권리가 없고 지금 경찰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며 고성을 지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파출소 이름을 묻는 시민에게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사진=송영훈 기자)
노 변호사는 "이는 경찰이 변호인의 조력 받을 권리와 변호인의 조력할 권리를 모두 침해한 것"이라며 "이름과 계급은 전혀 밝히지 않는 등 기본조차 준수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지난 30일 관할 파출소에 대한 청문감사 진정을 접수했다며 조사관을 배당해 감찰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2일 밝혔다. 동시에 변호권을 침해한 부분과 관련해서도 서울지방변호사회에 진정이 제기됐다.
한 일선 경찰은 "임의동행 시 임의동행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명확히 설명했어야 했다"며 "첫 번째 단계부터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인권경찰? 현장은 여전히 인권사각지대
최근 들어 경찰은 오랜 숙원사업이라며 수사권조정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며 경찰개혁위원회 출범은 물론 각종 과거 수사결과에 대해서도 뒤늦게 번복하고 사과했다.
특히나 지난 9월 경찰청은 경찰개혁위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변호인 접견신청은 안전과 질서유지 등에 지장이 없으면 허용하고 가족과 친구 등의 접견도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정작 일선 현장에선 피의자도 아닌 임의동행자에게 백지서명을 요구하고 변호권 등 기본적인 사항조차 준수하지 않아 논란을 빚을 전망이다.
A 씨는 "변호사까지 함께 온 상황에서도 경찰이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데 다른 일반 시민들에게는 어떻게 할지 너무 이해가 안 된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