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무효’ 촉구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이 도심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결정한 지 1년이 되는 지난 10일.
태극기 부대로 통칭되는 친박단체 회원들은 서울역에서 집회를 갖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지금까지 태극기 집회에서는 늘 성조기의 물결도 함께 이어졌다. 미국이 "우리의 영원한 동맹이자 은인"이라는 외침과 함께.
또 북한을 계속 압박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선제 타격을 해서라도 김정은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열변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집회에서는 참가자들의 손에 들려진 성조기가 다른 집회 때보다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바로 전날 긴급 타전된 북미 정상회담 소식은 북한을 북진통일의 대상으로 여겨온 분들에게는 '경천동지'할 얘기가 아닐 수 없었던 것 같다.
태극기 집회 단상에 오른 한 연사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절대로 김정은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열변을 토했다. 태극기를 흔들면서 "우리의 영원한 동맹이자 은인인 미국을 사랑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부분에서는 처연함도 느껴졌다.
'주적의 수괴'인 김정은과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1인자인 트럼프 대통령이 한자리에 앉아 회담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스토리다.
그것도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4월에 만나자며 트럼프가 더 적극성을 보였다니, 시쳇말로 '멘붕'으로 다가왔을 수 있다.
마치 '믿었던 트럼프 대통령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당황스러움은 보수 정치인과 보수 언론의 논조에서도 묻어난다.
조선일보는 12일자 사설에서 '트럼프가 핵 문제를 마치 자신이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다'며 너무 성급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북 비핵화는 이미 손에 쥔 것이나 다름없으며 5월 김정은을 만나 확인하는 절차만 남은 양 말하기 시작했다'며 '정말 차분하고 냉철하게 회담이 준비되고 있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북핵은 지난 25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인데 트럼프는 자신이 며칠 새 푼 것처럼 한다. 우리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
보수 성향의 다른 신문들도 사설에서 '다른 쪽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북미 정상회담을 낙관만 하긴 힘들다', '미국이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조급함을 보이고 있다'며 '북미정상회담 낙관은 금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모두 백악관 샌더스 대변인의 말을 인용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구체적 조치와 행동을 보지 않고는 김정은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부분이다.
이것이 북미정상회담의 추가적인 전제 조건인 것처럼 해석됐지만 백악관은 "새로운 전제조건을 의미한 게 아니다"라고 못박고 나섰다.
트럼프가 김정은의 비핵화 정상회담 제안에 대해 쌍수를 들고 환영하자 어느 때보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 실현에 대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정작 그동안 북한 핵의 조속한 폐기를 촉구해온 한국의 보수 언론들은 제동을 걸고 나선 형국이다.
또 한 보수언론인은 12일자 신문 기고문에서 '남북 문제가 잘되면 박근혜 정부를 무리하게 붕괴시킨 것과 이념 성향에 대한 논란, 정치·경제적 실책 시비 등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면 문재인 대통령과 외교안보통일 참모들이 가슴 벅차할 이유로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촛불 혁명'을 '국가적 변고를 초래한 것도 아닌데 국민직선의, 그것도 투표자 과반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을 임기 도중에 몰아낸 것'으로 폄훼했다.
그의 주장을 빌리자면 이 때문에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뭔가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 늘 남아 있을 법하고, 유난히 집권의 배경을 치장하고 싶어 하는데', 그래서 북한 김정은을 믿을 수 없음에도 무리하게 이 정부가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수락한 것은 '한국만이 나설 경우 북한 정권의 교활함에 속아서 미국과 국제사회에 북한의 의도를 잘못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성을 차단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 북한의 속내를 확인하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분석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8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행정부 관계자들을 접견 중이다. (사진=백악관 제공)
평양과 워싱턴을 오가며 어렵사리 북미 정상회담을 중재한 한국 정부는 믿지 못하고 미국은 신뢰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사대주의적 발상이다.
물론 남북이나 북미정상간 한번의 만남으로 북한 핵문제가 어느날 갑자기 해결된다거나 70년을 이어온 한반도 냉전 상태가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고 순진한 생각인 것은 맞다.
하지만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김부터 빼려는 시도나 도를 넘는 고춧가루 뿌리기는 곤란하다.
"나는 북한이 핵 폐기 약속을 이행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며 김정은과 만나기로 한 트럼프가 미덥지 못한 보수 언론.
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박근혜 정부를 무리하게 붕괴'시키고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다 깽판쳐도 괜찮다"고 말하는 무도한 세력으로 낙인 찍는 보수 저널리스트.
이들에게 지금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연일 남북·북미정상회담은 '환상'이며 '위장 평화쇼'라고 깎아 내리고 있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밖에 없을 듯하다.
[뒤끝작렬]은 CBS 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입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