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한국 당구 간판?' 김행직(왼쪽)과 최성원은 한국 당구 3쿠션을 대표하는 선수들이지만 최근 국내에서 동시에 열리는 두 대회에 나뉘어서 출전하게 됐다.(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최근 한국 당구 팬들은 혼란스럽다. 같은 기간에 굵직한 두 개의 3쿠션 대회가 국내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세계 정상을 다투는 한국 선수들은 두 개 대회에 나뉘어 출전하고 있다.
11일 춘천에서 막을 올린 '2018 대한당구연맹회장배 전국당구대회'와 12일부터 서울 임페리얼팰리스 호텔에서 열리는 '제 1회 3쿠션 당구 챌린지 월드 마스터즈 대회'다. 전자는 대한당구연맹이, 후자는 3쿠션을 주관하는 세계캐롬연맹(UMB) 주최다.
연맹회장배는 국내 대회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대거 출전한다. 남자 3쿠션 국내랭킹 1위 강동궁(동양기계)을 비롯해 '당구 천재' 김행직(전남연맹), 조재호(서울시청)에 신동 조명우(실크로드시앤티) 등이 나선다. '포켓볼 여제' 김가영도 출전한다.
3쿠션 챌린지는 세계 4대 천왕으로 불리는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 토브욘 브롬달(스웨덴),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다니엘 산체스(스페인)을 비롯한 세계 랭킹 20위권 선수들이 나선다. 국내 베테랑 최성원, 허정한 등도 자웅을 겨룬다.
두 대회가 겹쳐 김행직, 조재호는 각각 세계 3위와 8위임에도 3쿠션 챌린지에 나서지 못한다. 최성원, 허정한, 조치연 등은 또 연맹회장배에 나서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일정 조정만 이뤄졌다면 두 대회 모두 최고의 선수들이 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 1회 3쿠션 챌린지 월드 마스터즈에 출전하는 세계 최정상 선수들이 11일 미디어데이에 참석해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사진=코줌)
원인은 연맹과 UMB 간의 갈등 때문이다. 2년 전 중계권을 놓고 시작된 갈등은 최근에는 두 단체 사이의 자존심 대결로 이어진 모양새다. UMB는 연맹이 상급 단체의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연맹은 아무리 상위 단체라도 로컬룰을 깡그리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연맹은 2015년 2월 빌리어즈TV와 3년 7억5000만 원의 중계권 계약을 맺었다. 연맹 주최대회는 물론 10년 넘게 열린 국내 3쿠션 월드컵까지 대상이 됐다. 그러나 UMB가 2016년 4월 프랑스가 본사인 코줌과 콘텐츠 계약을 맺으면서 상황이 묘해졌다.
UMB가 주최하고 국내에서 열리는 3쿠션 월드컵이 두 매체의 교집합이 된 것. 2016년 8월 구리 3쿠션 월드컵을 빌리어즈TV가 중계하지 못한 게 대표적 사례다.
이후 지난해 12월 UMB가 이사회에서 코줌과 5년 독점 계약을 맺으면서 연맹과 갈등이 깊어졌다. 연맹 남삼현 회장도 이사회에 참석했지만 UMB는 만장일치로 안건이 통과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연맹은 UMB가 사전 고지 없이 안건을 통과시켰다며 강경하게 맞서고 있다.
이번 두 대회의 일정이 겹친 것도 이 때문이다. 연맹은 먼저 전국대회 일정을 정한 만큼 UMB가 3쿠션 챌린지를 연기하는 게 맞다고 주장하며 국내 선수들의 출전 금지를 통보했다. UMB는 선수들에게 출전의 자유를 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UMB 파룩 엘 바르키 회장은 11일 대회 미디어데이에서 "각 국가 연맹은 상급 단체인 UMB의 규정을 따르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맹 관계자는 "그래도 UMB가 한국에서 대회를 개최하면서 대한당구연맹을 배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남삼현 대한당구연맹 회장(왼쪽)과 UMB 바카리 회장.(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코줌)
피해는 선수들이 보고 있다. 3쿠션 챌린지는 올해 3번 열릴 예정인 가운데 총 상금 2억5000만 원 규모다. 상금이 많지 않은 당구에서는 큰 대회다. 여기에 세계 랭킹 상위권만 출전해 새로운 방식으로 치러져 흥미를 높이고 있다.
UMB가 막고 있는 연맹 주최의 'LG U+ 3쿠션 마스터스'는 지난해 우승 상금만 8000만 원으로 당구 사상 최고액이었다. 이런 대회를 국내 선수들이 마음 놓고 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당구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최성원은 이날 3쿠션 챌린지 미디어데이에서 "두 단체의 갈등을 벌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팬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산체스도 "정치적인 갈등은 사무실에서 하는 것"이라면서 "우리들은 경기장에서 플레이하길 원하는 선수"라고 힘주어 말했다.
사실 두 단체의 갈등이 깊어지면 공멸할 수밖에 없다. 두 단체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공생의 관계다. 한 쪽이 없으면 다른 한 쪽도 결국 쇠할 수밖에 없다. 두 단체의 갈등이 불거지자 벌써 일부 스폰서 기업과 지방자치단체가 후원 철회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 들려온다.
지난해 대한당구연맹회장배에서 우승하며 차세대 에이스를 입증한 조명우.(자료사진=대한당구연맹)
한국 3쿠션은 1990년대 고(故) 이상천 회장 이후 2000년대 들어 고(故) 김경률, 최성원, 조재호 등이 국제대회에서 낭보를 전하면서 큰 관심을 받았다. 이후 김행직, 조명우 등 엘리트 세대들이 막 빛을 보고 있다. 세계 강호들을 통쾌하게 꺾은 UMB 주최 국제대회가 없었다면 지금의 르네상스는 없었을지 모른다.
UMB 역시 마찬가지다. 당구 열기가 뜨거운 한국이 없다면 재정 기반이 크게 흔들릴 게 뻔하다. 바르키 회장은 "최근 선수들의 상금이 10배 가까이 늘었다"고 강조했다. 10년 전만 해도 국제대회 우승 상금은 고작 몇 백만 원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인기가 높아져 프로스포츠에 버금가는 시청률을 보이면서 스폰서 기업도 크게 늘었다. UMB가 이번 3쿠션 챌린지를 한국에서 개최한 이유다.
갈등이 봉합될 여지는 남아 있다. 바르키 회장은 "한국과 한국 선수들을 빼고 대회를 치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하면서 "우리는 연맹과 언제든 대화의 창을 열어놓고 있다"고 말했다. 연맹 역시 "UMB와 협상을 통해 해결 방안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자신의 이름을 딴 클럽을 여는 등 한국 당구 사정에 밝힌 산체스가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산체스는 "현재 두 단체의 갈등은 긍정적이지 않다"고 뼈있는 발언을 하면서도 "당구는 성장 과정에 있는 스포츠로 함께 노력하면 더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과연 세계 최고의 인프라를 갖춘 한국 당구가 UMB와 상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NEWS: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