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정상회담 사흘째인 9월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 부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한 것은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부터 마무리해야 한다는 이른바 '선미후남(先美後南)'의 일환으로 보인다.
다만, 앞뒤 정황과 표현 등을 감안했을 때 현실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여건이 마련되면 다시금 관계 개선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도 분석된다.
북한은 20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지난 11월 5일 문 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발표하며 "진정으로 되는 신뢰심과 곡진한 기대가 담긴 초청이라면 굳이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고 '사의'부터 표했다.
"모든 영접 준비를 최상의 수준에서 갖추어 놓고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거나 "이 기회라도 놓치지 않고 현 북남(남북)관계를 풀기 위한 새로운 계기점와 여건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고뇌와 번민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말도 이어졌다.
3개월 전 광복절 다음 날인 8월 16일에 문재인 대통령을 실명이 아닌 '남조선 당국자'로 칭하며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 "웃겨도 세게 웃기는 사람이다"는 등 '막말'에 가까운 언사를 내놓은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일반적인 외교 관례상 정상 사이 주고받은 친서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결례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정중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 뒤에 "흐려질 대로 흐려진 남조선(한국)의 공기는 북남관계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거나, 우리 정부를 "민족공조가 아닌 외세 의존으로 문제를 풀어가려 한다"고 비판하며 거절한 것은 현실적으로 현 시점에서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먼저 행동에 나서기 힘들다는 계산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연구소 정성장 연구기획본부장은 "김정은 위원장이 참석했다면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는 그것만으로도 매우 성공적인 이벤트가 됐을 것이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큰 선물이 됐을 것이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정 본부장은 "그 대가로 우리가 북한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남북대화를 전면 중단해 놓고 갑자기 우리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며 "우리 정부가 역지사지 입장에서 북한의 입장도 미리 이해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비판했다.
더군다나 북한은 최근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에 대해서도 외무성 대변인, 외무성 김계관 고문, 노동당 김영철 부위원장, 외무성 김명길 순회대사 등의 담화를 통해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지 않으면 북미대화는 힘들다"고 계속 강조해 왔었다.
가장 최근인 20일(현지시각)에는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외무성 최선희 제1부상 또한 흔치 않게 현지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지 않는 한 핵 문제와 관련한 논의는 협상탁(협상테이블)에서 내려졌다(내려왔다)"고 강조하는 상황이다.
지난 17일 오후에 나온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가 유엔의 대북인권결의안까지 문제삼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른바 '적대시 정책'이란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비롯한 안전보장 외에 제재 완화와 인권 문제까지 망라한 개념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그 동안 '생존권'과 '발전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제도(체제) 안전'을 위협하지 말라고 요구해 왔다.
이같은 행보는 자신들이 정해 놓은 '연말 시한'이 다가오자 초조함을 드러내면서도, 협상력 극대화를 위해 기싸움에 밀리지 않겠다는 특유의 '벼랑 끝 전술'로도 풀이된다.
그런 상황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먼저 방남해 남북대화의 물꼬를 튼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북한은 일단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이어 "때와 장소를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거나 "기대와 성의는 고맙지만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남 땅의 정서가 심히 깨끗치 못하다"거나 "자주적 결단이 언제 싹트고 자라나는가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겠다"는 등의 표현을 통해서, 그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는 것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우리 정부에 한 것으로도 해석되는 부분이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임을출 교수는 "북한은 기본적으로 현재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집중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부산을 방문하기는 어렵다는 메시지다"며 "우리 정부의 노력에 대한 진정성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촉구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우리 정부로서는 북한이 긍정적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국내정치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미국과 비핵화 협상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도록 중재 노력을 더욱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청와대는 이같은 북한의 반응에 "아쉽다"는 반응을 내놓으며 설명에 나섰다.
청와대 고민정 대변인은 20일 조선중앙통신의 발표가 나온 뒤 "지난달 말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고 강한옥 여사가 별세했을 때 김정은 위원장이 조의문을 보내 왔는데, 여기에 대해 지난 11월 5일 답신을 보냈다"고 밝혔다.
이어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 위원장이 참석할 수 있다면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의 공동노력을 국제사회의 지지로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사를 표명했다"며 "정부는 남북 정상이 모든 가능한 계기에 자주 만나서 남북 사이의 협력과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하여 국제사회의 이해와 지지를 받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거절에 대해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평화번영을 위해 아세안 10개국 정상과 자리를 같이 하는 쉽지 않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고 했다.
청와대의 표현대로 김 위원장이 '여러 나라 정상들을 만나는 기회를 활용하기'보다는 당분간 북미실무협상에 집중하겠다는 것으로 보이는 행보를 선택하면서, 그 동안 남북관계 교착은 계속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RELNEWS: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