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015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고 팬들의 사진 촬영에 응한 양동근 (사진 제공=KBL)
코로나19 확산의 여파로 조기 종료된 2019-2020시즌 프로농구는 울산 현대모비스의 간판 양동근에게 마지막 시즌이 되고 말았다. 지난 1일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하며 정든 코트를 떠났다. 'KBL의 레전드'로 기억될 양동근이 어떤 선수였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을 정리했다.
▲양동근 이름 석자를 널리 알린 첫 번째 통합 우승
양동근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로 첫 통합우승을 꼽았다.
양동근은 프로 3년차였던 2006-2007시즌에 많은 것을 이뤘다. 2년 연속 정규리그 MVP가 됐고 현대모비스의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끌었다.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사상 첫 만장일치 MVP로 뽑혔다.
양동근은 1차전(13득점 10어시스트)과 2차전(32득점 11어시스트)에서 연이어 '더블더블'을 작성했다. 마지막 7차전에서는 19득점 5어시스트로 활약했다.
승부를 가른 변수 중 하나는 실책이었다. 부산 KTF가 무려 18개의 실책을 기록한 반면 현대모비스의 실책은 4개 밖에 없었다. 볼 소유 시간이 길었던 양동근은 39분53초를 뛰고도 실책을 1개 밖에 기록하지 않았다.
KTF가 4점차로 추격한 3쿼터 막판 양동근이 스틸에 이어 속공 레이업을 성공하면서 상대 기세를 꺾었다. 마지막 4쿼터에는 돌파력을 앞세워 12점을 몰아넣었다. 양동근에게 특별한 친구였던 고(故) 크리스 윌리엄스와 함께 한 우승이라 더욱 의미가 컸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만든 해결사 본능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남자농구 대표팀은 2014년 10월3일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결승에서 이란을 만났다. 상대는 오랜 기간 아시아 최강으로 군림했던 중국을 '2인자'로 밀어낸 이란이었다. 미국프로농구(NBA) 출신의 센터 하메드 하다디가 버티는 강팀이었다.
한국은 4쿼터 막판 이란에 70대75로 뒤졌다. 패색이 짙었다. 흐름을 바꾼 선수는 베테랑 양동근이었다. 종료 1분9초를 남기고 3점슛을 터뜨렸다.
이어지는 이란의 공격을 막아낸 한국은 다시 양동근에게 공격을 맡겼다. 양동근이 골밑으로 파고들자 이란 수비가 흔들렸다. 양동근은 빅맨 김종규에게 절묘한 패스를 연결했고 김종규가 골밑슛 성공에 이어 추가 자유투까지 넣으면서 76대75 역전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이란을 1점차로 누르고 2002년 부산 대회 이후 12년 만에 아시아 정상의 자리를 되찾았다. 유재학 감독은 "양동근은 마지막 순간에도 역시 양동근이었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이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을 차지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KBL 제공)
▲성실한 자세, 꾸준한 성장
2015년 2월23일 울산에서 공동 1위 울산 현대모비스와 원주 동부가 만났다. 시즌 마지막 맞대결이었다.
경기 전 양동근을 둘러싼 양팀 사령탑의 생각은 달랐다. 유재학 감독은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것 같다"고 했지만 김영만 당시 동부 감독은 "안 지친 것 같은데, 에너자이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동부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양동근은 19득점을 올려 82대73 팀 승리를 이끌었다. 이전 2경기에서 각각 2득점, 6득점에 그쳤던 부진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큰 경기에 강하다.
3쿼터 막판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됐다. 양동근이 돌파 후 마지막 스텝을 밟은 순간 '동부산성'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양동근은 공을 높이 띄웠다. '플로터(골밑 블록슛을 피해 포물선을 높여 던지는 슛)'를 시도한 것이다.
양동근은 기술이 화려한 선수는 아니다. '플로터'와 같은 기술을 평소 활용하지 않는 편이다.
양동근의 슛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동부의 외국인선수 데이비드 사이먼이 깜짝 놀랐다. 경기 도중 양동근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양동근은 "러키(lucky)"라고 짧게 답하며 웃었다.
양동근에게 '플로터'를 적절히 활용한 이유를 물었더니 "대표팀 때 김선형이 그런 슛을 던지는 것을 보고 그건 대체 뭔 슛이냐고 놀리며 장난을 쳤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는건지 물어보곤 했다"며 웃었다. 이후 간간이 연습을 해봤다는 것이다.
조 잭슨(사진 왼쪽)과 양동근 (사진=KBL 제공)
▲'토종' 가드의 자존심
2016년 1월30일 경기도 고양실내체육관에서 고양 오리온과 울산 현대모비스, 당시 공동 1위 팀들이 맞붙었다. 정상급 포인트가드 맞대결로 관심을 끌었다. 오리온에는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자랑하는 조 잭슨이, 현대모비스에는 양동근이 있었다.
양동근은 경기가 끝난 뒤 조 잭슨의 기량에 혀를 내둘렀다. "1대1로는 절대 막을 수 없다. 정면에 서있어도 뚫렸고 워낙 탄력이 좋아서 수비를 달고 슛을 던져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역시 뛰어난 선수"라고 칭찬했다.
오리온 역시 양동근을 막지 못했다.
조 잭슨은 30득점을 퍼부었지만 양동근도 26득점 7어시스트를 몰아치며 반격했다. 당시 상대팀 가드에게 악몽같은 존재였던 조 잭슨을 상대로 이같은 활약을 펼칠 수 있는 토종 가드는 많지 않았다.
농구장 1,2층이 매진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던 두팀의 승부는 현대모비스의 80대75 승리로 끝났다. 유재학 감독은 "양동근이 많은 시간을 뛰었고 특히 3쿼터 흐름을 혼자 다 끌고 갔다. 동근이 덕분에 이겼다"고 칭찬했다.
▲챔피언결정전에 강했던 '모비스의 심장'
양동근은 승부처에 강하다. 그의 능력은 2019년 4월13일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열린 인천 전자랜드와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양동근은 종료 6.6초를 남기고 왼쪽 베이스라인에서 3점슛을 터뜨려 현대모비스의 98대95 승리를 이끌었다.
이때 현대모비스 백코트 전력의 중심은 양동근에게서 이대성이 물려받은 상황이었다. 마지막 공격 때 볼을 다룬 것도 이대성이었다.
이대성이 라건아의 스크린을 활용할 때 상대 센터 찰스 로드가 밖으로 나와 이대성을 견제했다. 이때 함지훈이 하이포스트로 올라왔고 이대성은 무리하지 않고 패스를 건넸다. 함지훈은 오랜 기간 함께 호흡을 맞췄던 양동근의 오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또 한번 패스가 이어졌고 양동근은 경기를 끝냈다.
현대모비스의 조직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양동근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위닝샷'의 기쁨을 표현하는 대신 "늘 크게 앞서 나가면 실책이 나온다"며 쉽게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어렵게 풀어갔다고 반성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이대성이 "우리가 이겼는데요. 뭘"이라고 말하자 양동근도 그제서야 환하게 웃었다.
2019년 챔피언결정전은 양동근의 경험이 크게 빛을 발했던 시리즈다.
양동근은 5차전 2쿼터가 끝나고 함지훈을 따로 불러 "우리 팀에서는 너와 나만 잘하면 돼"라고 다그쳤다. 효과는 컸다. 전반 무득점이었던 함지훈은 후반에 16점을 넣었다. 양동근 역시 후반에만 10점 2어시스트를 올렸고 단 1개의 실책도 범하지 않았다.
라건아와 이대성이 팀의 중심을 이뤘던 시즌이지만 여전히 양동근은 팀의 심장이었다. 현대모비스는 전자랜드를 누르고 우승했고 양동근은 KBL 개인 최다인 6개의 우승반지를 수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