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합니다.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거리에서, 가정에서 오늘도 일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쉼없이 조금씩 세상을 바꾸는 모든 노동자에게, 일터를 찾은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판깔아봅니다. [편집자 주]
박화진 고용노동부 차관이 25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한-EU FTA 노동분야 이행 관련 전문가 패널 결과보고서 주요 내용'을 설명한 뒤 패널 보고서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의 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소집된 전문가 패널이 '한국이 FTA 협정의 기준을 넘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유럽연합(EU)과의 분쟁에서 큰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전문가 패널이 내놓은 보고서를 살펴본 결과 한국의 핵심협약 비준 노력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렸고, 개정된 노조법도 전문가의 권고사항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할 것으로 보여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韓 ILO 협약 비준 노력, FTA 협정 위반 아냐…노조법은 개선 권고"한-EU FTA에 따라 소집됐던 전문가 패널은 지난 20일 최종보고서를 양국에 제출했다. 앞서 EU가 한국을 상대로 2018년 12월 FTA 분쟁해결절차에 돌입했고, 2019년 7월 절차 수위를 '정부간 협의'에서 한 단계 높여 전문가 패널에 회부한 데 따른 것이다.
EU가 제기한 쟁점은 두 가지다. 우선 한국이 ILO 핵심협약 중 4개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는 FTA 조항을 어기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EU FTA 전문가 패널 보고서 화면 캡처.
또 ILO 기본권 선언에 있는 노동기본권 원칙을 자국의 노동법·관행을 통해 존중·증진·실현하기로 약속한 조항도 어겼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패널은 협약 비준 노력에 대해서는 "한국의 노력 자체는 한-EU FTA 규정에 정한 법적 기준에 미달하지 않는다"고 보면서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전문가들은 ILO 핵심협약 비준에 관한 FTA 규정은 반드시 협약 비준 등 성과를 내야 하는 '결과의 의무'(an obligation of result)가 아니라 ''최선의 노력'의 의무'(an obligation of 'best endeavours')이고, 구체적인 목표나 일정 없이 진행하는 성격을 갖는다고 해석했다.
이에 따라 비록 한국이 아직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2019년 10월 3개 핵심협약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반면 한국의 노조법이 FTA에서 요구한 대로 노동기본권 원칙을 존중·증진·실현했느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고 개선을 권고했다.
다만 정부는 패널 보고서가 지난해 11월 25일을 기준으로 작성됐는데, 다음 달인 12월 노조법의 해당 조항들이 개정돼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고용노동부 박화진 차관은 "EU가 그동안에 문제 제기했던 부분은 대부분 해소됐다고 판단한다"며 "2월 국회에서 비준안까지 통과돼 ILO의 비준서를 기탁하면 경제적 ·정치적인 압력에 대한 우려는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국의 협약 비준 노력 부족해…비준동의안 국회 통과 늦어지면 약점 될 수도
'한-EU FTA 노동분야' 정부 입장 설명하는 박화진 차관. 연합뉴스
이렇게 보면 이번 전문가 패널 심리에서 한국이 EU를 상대로 마치 완승을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선 전문가 패널 보고서는 그 자체로 강제력을 갖지 않는다. 한국과 EU는 앞으로 FTA 협정에 따라 설치된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이번 보고서를 토대로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그런데 전문가 패널은 FTA 협정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을 '결과의 의무'로 규정했다는 EU의 주장을 물리쳤지만, '단순히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최소한의 노력만 해도 된다'는 한국의 주장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노력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한국 정부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 '최적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less than optimal) 비판하고, 최근 3년 동안 한국 정부의 노력을 '법적 문턱을 넘은'(satisfy the legal threshold of the provision) 수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즉 한국이 명확하게 FTA 규정을 어겼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동안 한국의 노력이 충분치 않았고 앞으로도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된다고 강조한 셈이다.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동의안을 2월 국회에서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지만, 정작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는 관련 논의가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만약 국회가 비준동의안 처리에 속도를 낸다면 한국에게 유리하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향후 논의 과정에서 EU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다.
◇너무 좁은 '근로자' 개념, 노조법 개정 대상서 빠져 전문가 지적 만족 어려울 듯
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국내 노조법에 대한 지적이다. 새로 개정한 노동법이 전문가 패널의 권고사항을 만족한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을 EU가 순순히 동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EU는 한국의 노동법에 대해 △노조법상 근로자의 개념 △노조 결격 사유 △노조 임원 자격 제한 △노조설립신고제도를 문제 삼았다.
이 가운데 노조법상 근로자 개념에 대해 박 차관은 "매우 폭넓게 규정돼 특고의 노조 설립과 가입을 인정하는데 문제가 없다"며 "이미 배달기사, 보험설계사 등 다양한 특고 노조가 설립돼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심리 과정에서 독일의 '종속적 자영업자'(dependent self-employed) 개념을 거론하며 EU 회원국도 한국과 같은 처지라고 주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전문가 패널은 '근로자'에 대한 한국 노조법의 정의가 '결사의 자유' 기본권에 대한 원칙과 일치·존중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자영업자와 해고자, 실업자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를 '근로자'의 정의에 포함시키라고 권고했다.
즉 한국의 노조법이 특수고용노동자처럼 자영업자와 노동자의 경계에 있는 이들에 대해 결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도록 배제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독일 사례에 대해서도 독일법은 한국의 노조법과 달리 특정한 종속적 계약자에게 권리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고, 종속적 자영업자의 기준이 한국보다 더 넓다고 반박했다.
문제는 노조법에서 근로자의 개념을 정의한 제2조 제1호는 이번 노조법 개정에서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노조법 개정 여부에 관계없이 전문가 패널의 지적이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민주노총 류미경 국제국장은 "전문가 패널은 현행 노조법상 근로자 정의 조항은 물론 다소 넓어진 대법원의 해석조차도 종속성이 없는 프리랜서나 법적으로 개인사업자로 규정되는 플랫폼 노동자를 배제하고 있어 결사의 자유 위반이라고 명시했다"며 "노조법 2조 1호를 원칙에 부합하도록 개정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근로자가 아닌 자'의 노조 가입을 막은 2조 4호 라목 전체를 삭제하라는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CFA) 권고와 달리 단서조항만 빠졌기 때문에, 이 역시 개정안으로도 EU와의 분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한국, 기업 임원 해고하면 노조 끝나" 지적…개정 노조법에도 문제점 그대로 남아전문가 패널은 노조 임원을 조합원 중에 선출돼야 한다는 노조법 제23조 1항의 요건을 삭제하고, 노조가 임원을 자유롭게 선출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실제로 개정된 노조법에서는 노동조합의 임원 자격을 자체 규약으로 정하도록 허용했는데, 기업별 노사협약이 중심인 국내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기업별 노조 임원은 회사에 종사하는 조합원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전문가 패널은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CFA)는 노조 임원이 기업 노조에서 일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결사의 자유에 반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며 "기업 노조 간부를 해고하면 노조 역할도 끝날 수 있는 위험이 한국법에 내재됐다"고 지적했다.(The CFA notes that one danger inherent in the current Korean law is that the dismissal of a union official of an enterprise union means their union role is also at an end)
이처럼 전문가 패널이 노조 임원의 자격에 대한 법 조항을 지적하면서 제시한 문제점이 개정된 노조법의 기업별 노조 임원의 자격 제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만큼 이 역시 EU와 분쟁을 빚을 수 있다.
국내에서도 노동계는 지난 노조법 개정이 국제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번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며 반발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은 논평을 통해 "정부는 줄곧 노조법 개정안이 국내법을 국제기준에 부합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조치며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절차라고 주장해왔으나 전문가 패널의 결론은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모든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노조법 2조 1호 ‘근로자 정의’를 개정하고, 노조법 2조 4항 라목 본문을 삭제해야 한다는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해야 한다"며 "‘위의 사항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EU의 문제 제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으므로 법 개정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RELNEWS: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