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이미지 제공여기 A라는 판사가 있다. 한 대법관이 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특정 사건 담당 판사들에게 재판과 관련해 지시로 해석될 수 있는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자 A는 법원 내부망에 올린 글을 통해 문제의 대법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법관이 외부 압력에 의해 재판을 했다면 아무리 사소한 재판이라도 자체가 무효"라는 것이 A의 일갈이었다. 갓 불혹을 넘긴 젊은 판사가 '법관중의 법관'이라는 대법관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며 사람들의 갈채를 받은 순간이다.
진보성향 판사들 모임 회원이기도 했던 A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항소심 법원의 첫 번째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내는 등 소수자들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법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A가 특히 관심을 가진 분야는 '법원의 독립성'으로 추정된다. 사법행정과 법관 인사에 참여하는 '전국판사회의' 상설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추진단장을 맡은 이유일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이 불거지자 이 법관회의에서 동료법관들의 탄핵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판사였다.
여기 B라는 판사도 있다. B는 대법원에 사표를 내고 지방법원 부장판사 자리에서 물러난 지 석 달만에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임명됐다. 동료 판사들 사이에서 "사법부 독립에 심대한 악영향"이라는 비판이 터져 나왔지만 "사표를 낸 것은 법무비서관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B판사의 한마디로 만사 OK였다. 자신이 속했던 법원 내 연구모임 게시판에 법무비서관 내정설이 제기되자 B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는 글을 올려 거짓 해명 논란에 휩싸였지만 '소리없는 아우성'에 그쳤다.
동료 법관들의 분노가 가시지 않자 대법원이 직접 "법관으로서 퇴직 후 일정 기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은 대통령 비서실 소속 직위에 임용될 수 없도록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현재 여러 건 발의돼 있다"며 진화에 나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스마트이미지 제공주변의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같은 정권 아래서 B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1년여 법무비서관 생활을 마치자 곧바로 유수의 대형 로펌에 들어갔다.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밀접한 업무 관련성을 이유로 로펌에 대한 '취업제한'을 결정했지만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B는 곧바로 '취업승인심사'를 신청해 보란 듯이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고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영전했다.
사족이 길어졌지만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A와 B가 동일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민정수석으로 임명된 김영식 변호사가 당사자다.
거짓말을 밥먹 듯 하고 과거 자신의 발언과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 곳이 정치권이라지만 일반 국민들이 A와 B가 동일인이라는, 더구나 판사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게 현실이다.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주인공은 평소에는 선량하고 정의로운 의사이지만 때론 악으로 가득찬 인격으로 돌변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김영식A'에서 '김영식B'로의 변신은 판사 버전 '지킬과 하이드'라 불러도 손색 없을 지경이다.
17일 신임 청와대 민정수석에 임명된 김영식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 연합뉴스김영식 민정수석 임명이란 사건에 굳이 복잡한 정치적 의미까지 들이대며 분석할 가치는 없어 보인다. 전직 판사의 민정수석 임명이 삼권분립의 근간을 흔든다는 식의 비판도 진부한 명제가 돼버렸다. 김 수석이 남긴 가장 큰 후유증은 '사법부 독립'이란 대명제의 순수성을 이제 어느 누구도 쉽게 신뢰하기 힘들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김 수석의 동료·후배 법관 중 누군가가 불의에 맞서 '사법부 독립'의 대의를 외치고 수호하고자 해도 이제 그들의 '순수성'에 대한 국민들의 의심은 계속될 것이고 대의의 동력은 떨어질 것이다. 동료·후배 법관들 상당수는 지금도 김 수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영식이 앞장서 비난했던 '양승태 사법농단'과 '김영식의 청와대 입성' 중 어떤 것이 '사법부 독립'에 더 해악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