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 벤투 감독. 연합뉴스월드컵은 국가 단위로 펼치는 축구 전쟁입니다. 축제라는 아름다운 표현도 있지만, 전쟁이라 말한 이유는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환호와 눈물 등 감정이 엇갈리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월드컵 기간에는 선수들에게도 애국심이라는 특별한 버프가 걸립니다. 부상을 당해도 뛰는 투혼 등이 바로 애국심이라는 버프 때문이겠죠.
2022 카타르월드컵도 마찬가지입니다. '캡틴'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은 안와골절로 수술을 받고도 안면 보호 마스크를 들고 대표팀에 합류했습니다. 김민재(SSC 나폴리)는 종아리 근육 부상에도 진통제를 먹고 뛰었고, 황인범(올림피아코스)도 가나전에서 붕대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애국심이 절정에 달하는 월드컵에서 조국과 적으로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 축구 대표팀의 사령탑 파울루 벤투 감독입니다. 아시다시피 벤투 감독의 국적은 포르투갈입니다. 포르투갈은 한국의 H조 마지막 상대죠. 속마음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벤투 감독도 조 추첨에서 포르투갈인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벤투 감독 덕분인지 한국과 우루과이의 1차전 사전 기자회견부터 포르투갈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다들 한국과 포르투갈전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직 우루과이전도 열리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벤투 감독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프로"를 강조했죠.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이란을 이끌고 포르투갈을 상대했던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의 예도 들었습니다.
"저는 포르투갈 국민입니다. 평생 포르투갈 국민일 것이고, 경기할 때도 포르투갈 국민입니다. 하지만 프로로서 한국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런 상황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감독들이 출신국이 아닌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경우가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브라질 출신 감독이 이란 감독을 맡기도 했고, 케이로스 감독은 2018년에 조국을 상대했습니다. 포르투갈을 응원하지만, 내가 할 일은 한국 감독으로서 포르투갈전을 철저히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벤투 감독은 조국 포르투갈전에서 벤치에 앉을 수 없습니다. 가나와 2차전 종료 후 레드카드를 받은 탓입니다.
3차전 사전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질문들이 많이 던져졌습니다. "포르투갈 국가를 듣다가 애국가를 듣는 기분"을 묻기도 했습니다. 벤투 감독은 "애국가가 울릴 때도 어떤 감정이 들 것 같다. 포르투갈 국가를 따라부를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포르투갈 국민이고,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을 오래 지도해온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고 답했습니다.
어느덧 벤투 감독과 함께한 시간도 4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사실 벤투 감독은 한국과 악연이 있었죠. 선수 시절인 2002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에서 한국에 패하며 탈락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국전을 끝으로 포르투갈 국가대표에서 은퇴했습니다. 20년이 흐른 지금은 선수로서 마지막 A매치 상대였던 한국 지휘봉을 잡고 있네요. 그리고 어쩌면 한국과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경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벤투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도 참석할 수 없습니다. 정말 사전 기자회견이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벤투 감독의 사전 기자회견 마지막 멘트를 전해드립니다.
"한국과 4년 이상을 함께했습니다. 월드컵이라는 여정이 끝나면 원했던 결과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해왔던 유기적인 프로세스가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부 목표 달성을 했습니다. 월드컵에 왔습니다. 선수들은 선수로서, 저는 감독으로서 최선을 다했고,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축구를 위해 열심히 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었습니다. 포르투갈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자랑스럽고,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 여정을 기억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