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가 진행되는 모습. 윤창원 기자정부가 일제 강제동원(징용) 문제를 풀기 위해 별 담보도 없이 과감한 '선(先) 해결' 방식을 택했다. 우리가 피해자들에게 배상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고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기다겠다는 것이다.
정부 나름의 고심에 찬 결단이겠지만 진퇴양난에 빠질 위험이 크다. 일본이 제대로 호응해주면 좋지만 그렇다는 보장은 없고 오히려 회의적이다.
정부 해법에 대한 피해자 측의 반발은 12일 국회 토론회에서 거듭 확인됐다. 얻은 것 없이 일본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듯한 결과에 "매국노" 같은 고성이 오가며 파행을 거듭했다.
피해자 단체는 여론의 지지를 업고 촛불시위 등 국민운동으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정부는 사전준비 단계에서부터 잇단 파열음을 내며 반대운동의 동력을 키워놓은 측면이 있다.
지난해 민관협의는 피해자 측의 중도 이탈로 반쪽 운영됐다. 피해자 측 임재성 변호사는 "외교부와의 신뢰관계가 완전히 파탄 난 상황"이라고 했다.
최근 한일의원연맹과 공동 개최하기로 했던 토론회도 소통 부재 탓에 야당이 불참했다. 여론은 싸늘하고 국회 제1당의 협조도 얻기 힘들어진 셈이다.
日 책임 빠진 대위변제…"매국노" 반발기류 확산, 법리 공방도 우려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개회사를 하는 가운데 일부 참석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있는 모습. 윤창원 기자정부는 더 밀어붙일 수도 물릴 수도 없는 형국이다. 일본의 배상을 얻어내기가 사실상 어렵다고 말해버린 순간 이미 위험지역에 들어섰는지 모른다.
만약 정부가 피해자 동의 없이 최종안을 확정한다면 엄청난 역풍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일본 산케이 신문도 한국 내 기류를 전하며 제2의 위안부 합의 가능성을 언급했을 정도다.
정부가 법률적 수단으로 내건 '제3자 변제'나 '병존적(중첩적) 채무 인수'도 본질을 벗어난 법리 공방으로 변질돼 지루한 소모전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다.
제3자 변제는 원래 채권자(피해자)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강제동원 건의 경우 '약정채권'이 아닌 '법정채권'이기에 채권자 동의 없는 변제가 가능하다는 학설이 있다.
병존적 채무인수는 아예 채권자 동의가 필요없는 방식으로 알려졌지만, 채권자가 '수익(이익을 받겠다)의 의사 표시'를 하지 않으면 제3자의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 판례조차 별로 없는 매우 이례적 상황이기 때문에 벌써 해석이 분분하다. 20년 넘게 이어진 강제동원 배상 재판에 이은 또 다른 송사가 우려된다.
이 와중에 일본이 조만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하게 되면 정부는 일본에 뒤통수를 맞는 격이 된다. 공교롭게도 사도광산은 논란의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이다.
다음 달부터는 역사‧독도 관련 교과서 문제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한일 간 각종 민감한 문제가 줄줄이 이어진다. 여름 전 예상되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은 그야말로 메가톤급 시한폭탄이다. 정부는 국내 반발과 일본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할 수 있다.
후퇴하면 국정동력 타격, 외교 후폭풍…후쿠시마 오염수 등 악재 줄줄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규탄 피켓을 들고있는 모습. 윤창원 기자그렇다고 정부가 이미 발표한 것을 접고 물러서기는 더욱 어렵다. 여론 동향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윤 대통령은 전 정부의 '죽창가 외교'를 비판하며 조속한 한일관계 복원을 강조해왔다. 피해자 반발을 걱정해 물러선다면 정권 초반부터 핵심 국정과제의 실패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정부는 일방적 양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도·태평양전략 동참과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 일본의 재무장 지지 등 미국과 일본의 요구를 전폭 수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일관계의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려는 계획이 막판에 무너질 수 있다. 만약 강제동원 해법이 다시 좌초한다면 외교적 후폭풍 또한 클 수밖에 없다.
일본은 '이기는 게임'…한국이 양보하면 외교적 승리, 안 하면 책임 전가
한일 외교장관. 연합뉴스그에 반해 일본 정부는 어느 쪽이 됐건 나쁘지 않은 '꽃놀이패'를 쥐었다. 교도통신은 일본 총리 관저 소식통이 한국 측 해법을 "현실적"이라고 평가했다고 12일 보도했다.
한국 정부가 사법부 판결에 반하면서까지 일본 책임을 면책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특유의 표정관리다.
일본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한국 측의 구상권 포기 방안을 희망한다고 통신은 전했다. 일단 테이블 위에 오른 것부터 챙기고 '플러스 알파'까지 얻어내겠다는 심산이다.
만약 정부가 이마저 수용한다면 일본의 법적 책임은 완전히 사라진다. 일본 기업으로선 기껏해야 도의적 차원에서 한국 피해자들에게 기부하는 격이 된다. 피해자 측이 '구걸 외교'라고 비판하는 모양새와 일치하기 때문에 정부로선 매우 난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본으로선 어찌 됐건 이기는 게임이다. 이미 미일 정상회담으로 점수를 쌓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게 한국에 대한 외교적 승리는 더 큰 호재다.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한국에 책임을 전가하면 그만이다.
기시다 총리는 5월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와 이를 계기로 한 윤 대통령 초청 여부 등 외교적 카드도 상대적으로 많다.
한 전직 외교관은 "일본은 한국 내 상황이 혼란스럽게 돌아갈수록 꽃놀이패이고, (가해자인) 자기들이 오히려 채점관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