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초대 국장 오토 디캠프. CBS 제공한국을 위해 몸 바친 외국인들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어니스트 베델,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호머 헐버트. 이들은 사후에도 한국 땅에 안장돼 기억돼온 인물들이다.
이들처럼 한국을 사랑했지만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외국인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선보인다. CBS는 선교사이자 언론인 E. 오토 디캠프(1911~2001)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디캠프'를 다음달 방송한다.
디캠프는 미국인 내한 선교사의 아들로 1911년 서울 종로구 홍파동에서 태어났다. 1927년 임기를 마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 간 디캠프는, 목사 안수를 받고 1938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 신분으로 다시 한국을 찾는다.
당시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대륙침략과 한국에서의 황국 신민화 정책이 본격화 하던 때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교회가 굴복한 후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던 1941년 1월, 디캠프는 한국인 신자 집에 설치된 가정 신사(神社)인 가미다나(神棚) 철거를 감행하고 체포돼 사상범으로 대전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결혼 6주차 신혼 초 일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한국인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내가 직접 철거했다"고 진술했다. 미국인 선교사가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에 미 대사관과 국무부는 분주하게 대응했다. 결국 1941년 7월 일제 하 경성복심법원은 10개월 노동 징역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디캠프는 미국으로 추방됐다.
다큐 '디캠프'는 미 국무부 문서, 북장로교 선교부 보고서, 일제 법원 판결문 사본을 통해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재연한다. 실제 행동으로 일제에 저항한 선교사는 거의 없었던 시기에, 신앙양심에서 비롯된 디캠프의 항거는 이후 펼쳐지는 그의 삶의 예고편이었다.
첫 민간방송 CBS 설립…라디오 전성시대 개막
서대문형무소 앞에 선 디캠프. CBS 제공자신에게 고난을 안겨준 땅이었지만 디캠프는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북장로교 선교부에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기회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송선교'였다.
2차 세계대전 후 미디어를 통한 선교에 나선 국제선교협의회(IMC)가 1946년 한국기독교연합회(NCCK)에 라디오 방송국 설립을 제안했고, 미국교회 지원으로 한국에 방송국을 세우는 일을 디캠프가 맡게 된 것이다.
1948년 9월 디캠프는 7년 만에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여진 길은 순탄치 않았다. 한국 교회와 함께 이승만 정부로부터 방송국 설립 허가를 받아내지만, 6·25 전쟁 발발로 방송장비는 일본 고베항 창고에 묶이고 그는 전쟁 난민 구호에 전념했다.
종전 후 1년여 만인 1954년 12월 15일 오후 6시, 마침내 종로2가 기독교서회 건물 5층 A스튜디오에서 호출부호 HLKY,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 CBS의 첫 전파가 쏘아 올려졌다.
선교방송을 표방한 CBS였지만 초대 국장(현 사장) 디캠프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듣는 이가 없다면 천사가 마이크를 잡아도 헛되다"
4·19혁명 현장 생중계하는 CBS 방송부. CBS 제공그는 CBS 주파수가 교회 밖에 있는 90%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도달하기를 원했다. 당시 최신식 장비인 LP판을 미국에서 공수해온 그는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수정탑' '이 생명 다하도록' 같은 드라마 히트작을 연달아 선보였다. 그 덕에 CBS는 청취자 70%가 비기독교인일 정도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국영방송 KBS와 경쟁하며 195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를 연 디캠프와 CBS에게 격동의 1960년대가 다가온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 시기 CBS는 종로2가 사옥 옥상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며 생생한 현장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다. 시위 현장 어디서든 CBS 마이크를 만날 수 있었다. 혁명기간 진실 보도에 목말랐던 시민들은 정부의 입장만을 대변하던 국영방송 대신 CBS에 라디오 다이얼을 맞췄다. 정규편성을 중단하고 전 직원을 4·19 특집보도 제작에 동원했고 디캠프 국장 이하 모든 간부가 숙직하며 뉴스 제작을 지휘했다.
당시 한국 기독교계가 여전히 이승만 정부를 지지하던 상황에서 CBS의 이런 선택은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후에 디캠프는 "4월 혁명을 계기로 CBS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사람들은 기독교방송이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회고했다.
다큐 '디캠프'는 4·19 정국 속 한국 방송계의 대응을 디캠프의 리포트, 1960년 CBS 사업보고서, 계간지 '방송' 등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드러낸다. 이후 CBS는 보도계 조직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뉴스 제작 편성에 나선다. 그렇게 1970년대로 이어지는 '진실보도를 추구하는 기독교 저널리즘' 전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할 일을 다 했을 뿐입니다"
4·19 특집보도로 정부 표창장을 받는 디캠프. CBS 제공1968년 디캠프는 돌연 국장에서 해임된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외국인은 언론사 대표를 맡을 수 없다'는 전파관리법 상의 규정을 엄격하게 다시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3선 개헌을 앞두고 공보 기능을 강화하던 박정희 정부가 '할 말은 하는' 디캠프와 CBS를 자기에게 우호적인 세력으로 보지 않은 결과였다.
디캠프가 국장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저널리즘 원칙을 세운 CBS는 1970년대 이후에도 '종로5가 기독교회관'으로 상징되던 민주화·인권운동의 흐름 속에 함께하며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진실 보도의 전통을 이어간다.
임기 정년을 마친 디캠프는 1976년 5월 김포공항에서 수백명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49년을 살아온 한국과 이별한다. 그는 "나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고별사를 남겼다.
다큐 '디캠프'는 미디어학자, 교회사학자 10명의 자문과 인터뷰를 통해 역사적 팩트를 고증했다. 특히 1930년대부터 작성돼 수백 장에 달하는 디캠프의 서신과 보고서, 미국 국무부 자료와 신문 잡지 기사는 사실성과 신뢰도를 높였다.
디캠프 선교사의 아들 짐 디캠프 목사가 직접 프리젠터로 출연해 숨겨져 있던 가족사를 이야기하며 역사 다큐멘터리의 딱딱함을 벗어난 점도 특징이다.
연출을 맡은 CBS 김동민 PD는 "다큐 '디캠프'는 단순히 한 개인과 방송국의 역사가 아닌 한국 선교역사, 방송역사, 사회운동사를 아우르는 작품"이라며 "일제 강점기 하 교회와 선교사들의 대응, 해방 후 한국 방송 현실과 방송선교에 대한 교회의 도전, 민주화 운동에 나선 교회의 움직임과 기독교방송의 관계 등을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방송계와 기독교계, 특히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국을 살아가는 크리스천 시청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큐 '디캠프'는 다음달 3일 밤 10시 20분 CBS TV에서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