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은 한강 철교를 미 공군이 폭격하고 있다. (사진=미 국립항공우주박물관 제공)
◈ 인민군이 서울 도심에 못 들어왔는데도 한강다리 폭파하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남쪽.
국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황원희 중위 등 장교 3명은 이시영 부통령이 다리를 넘어오자 도화선 4개에 불을 붙였다.
"쾅~쾅~쾅"
먼저 한강철교 3개 지점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하늘에 큰 화염이 일었다.
10분 후에는 한강인도교 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되었다.
이순간에 한강 인도교를 건너가던 트럭들과 사람들이 산산조각 나면서 한강으로 날라갔다.
남아 있는 다리 위에는 시체와 부상자가 즐비했다.
당시 강을 건너기 위해 인도교에 가까이 있었던 어느 특파원은 "지프차에서 도강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오렌지 색깔의 큰 화염으로 밝아지고 굉장히 큰 폭발소리가 들리면서 우리가 탄 지프가 4~5미터나 공중으로 올라 날라갔다"고 회고했다.
북쪽 두번째 아치가 폭파된 한강 인도교 (사진=전쟁기념관 제공)
폭파 장면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은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500~800명의 인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밀려드는 인파와 차량을 헌병들이 통제하면서 주로 군인과 경찰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희생자에는 민간인이 많지 않았다.
희생된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확인된 경우는 종로경찰서 직원 77명 뿐이다.
◈ 한강다리 폭파, 절반의 성공에 그치다
한강다리가 끊기자 병사들은 제각각 이런 식으로 배를 마련해 도강했다.
이렇게 많은 인명피해를 보면서 다리들을 폭파했는데 그 결과는 어땠을까?
한강의 다리들은 모두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
한강 인도교와 경인철교 하행선, 경부복선철교 상행선은 완전히 끊겼지만, 경인철교 상행선과 그 옆에 있던 경부복선철교 하행선은 온전했다.
2개의 다리에 설치한 폭약이 폭발하지 않은 것이다.
인민군은 이 다리를 이용해 사흘 후 한강을 넘어간다.
파괴되지 않은 철교를 이용하여 한강을 도하하는 인민군 기갑부대. 그들은 마음만 먹었다면 즉시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미군은 6월 29일부터 이틀동안 B-26 폭격기를 동원해 한강철교를 맹폭격했지만 절단에 실패했다.
공식적으로 철교가 폭격기에 의해 완전히 끊어진 것은 7월 16일에 가서였다.
◈ 정부와 군 상층부, 끗발 순으로 피난가고 서울 시민 대부분 고립되다6.25 전쟁이 발발한 후 서울시민이 정부의 공식 발표를 들은 것은 6차례였다.
국방부 담화문이 6월 25일 정오에, 무초 미국 대사의 입장 발표가 6월 26일 새벽 6시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생방송이 같은 날 아침 8시에 발표됐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 발표가 6월 27일 밤 10시부터 11시까지 3번 반복 방송되었다.
가장 악영향을 끼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였다.
그는 피난간 대전에서 녹음한 연설을 통해 "유엔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했고,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군수와 물자를 날라 도우니까 국민들은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이 방송을 듣고 피난길에 나서려던 많은 서울시민들이 도로 짐을 풀고 주저 앉았다.
정부와 국회, 서울시민을 모두 적지에 두고 새벽에 도망간 이승만 대통령(왼쪽). 공식적인 '피난민 제1호'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날 새벽 3시에 경무대를 빠져 나와 서울역에서 특별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가다가 대구에 도착했으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에 따라 열차를 되돌려 대전에서 내렸다.
충남지사 관사에서 여장을 푼 이승만은 태연하게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담화문을 녹음한 것이다.
대통령이 도망간 것을 뒤늦게 안 신성모 국방장관이 27일 오후 2시에,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새벽 2시에... 군 지휘 라인에 있던 인물들이 끗발 순서대로 한강을 넘은 후 한강다리가 끊겼다.
채병덕은 미아리에 인민군 탱크가 들어오던 무렵 "적의 전차가 시내에 들어왔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고 다리를 폭파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서둘러 한강을 건넜다.
서울 방어의 중핵인 의정부 지구에서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 (가운데 철모를 쓴 뚱뚱한 인물)
한강다리가 끊기자 대다수의 서울시민들과 상당수의 국군, 엄청난 전쟁물자가 북한의 수중에 떨어졌다.
폭파 직후인 7월 초 주한미군사고문단이 조사한 결과, 전쟁 발발 당시 9만 8천 명이었던 국군이 5만 4천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고 1주일 사이에 4만 4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다는 얘기다.
또 미 극동사령부의 전방지휘소 처치 준장은 6월 29일 전선을 시찰하러 수원에 온 맥아더 장군에게 2만 5천 명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전쟁 개시 4일만에 남은 병력이 1/4로 줄었다는 보고다.
군사전문가들은 인민군이 서울역 등 시내 중심가로 들어선 것을 28일 낮 12시 정도로 보고 있다.
따라서 6~8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도 폭파를 서두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인민군 탱크 T-34.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맹위를 떨친 소련제 무기다.
너무 서두른 폭파 때문에 서울 시민 대부분은 물론 1만 명에 달하는 군사력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조기 폭파의 책임, '최창식 공병감'이 다 뒤집어쓰다한강다리 폭파에 대한 비난이 일자 이승만 정부는 서둘러 속죄양을 찾았다.
군사작전의 총책임자인 채병덕 전 참모총장이 하동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그의 지시를 받고 다리를 폭파한 최창식 공병감이 책임을 뒤집어 쓰고 체포됐다.
그는 1950년 9월 16일 '적전비행'의 죄목으로 부산에서 총살되었다.
폭파의 책임은 당시의 지휘체계로 본다면, 대통령 이승만~국방부 장관 신성모~국방부 차관 장경근~참모총장 채병덕~참모부장 김백일로 내려가야 하는데 최말단 실무 책임자에게 떠넘긴 것이다.
그러나 최창식 대령의 미망인은 12년 후 재심을 청구했다.
최 대령은 군법회의 판결 재심을 거쳐 1964년 10월 23일 무죄를 선고받아 사후에 복권되었다.
그것으로 이 사건은 흐지부지되면서 역사적 심판으로 숙제를 남겼다.
한편 간신히 서울을 빠져나온 국회의원 50여 명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결의했다.
대통령이 국방을 등한시하고 정부가 경솔하게 행동해 서울시민과 국민들을 전란의 회오리에 몰아 넣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신익희. 이승만의 사과문 발표를 받는데 실패한다.
이같은 결의를 전달하기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간 신익희 국회의장과 장택상. 조봉암 부의장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승만은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 사과할테면 당신들이나 하세요" 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런 인물이 최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문창극이 가장 존경한다는 사람이다.
이렇게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난 이 참혹한 전쟁이 문창극이 말한 '하나님의 뜻'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