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시절 이만기와 맞대결을 펼치던 이봉걸(왼쪽). 얼핏 봐도 키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유튜브 영상 캡처)
[90년대 문화가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토토가'는 길거리에 다시 90년대 음악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90년대는 스포츠의 중흥기였습니다. 하이틴 잡지에 가수, 배우, 개그맨 등과 함께 스포츠 스타의 인기 순위가 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면 90년대 스포츠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90년대 문화가 시작된 1990년 오늘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씨름은 힘이 중요한 운동입니다. 물론 기술 씨름이라는 말도 있지만, 일단 기본적인 체격 조건은 갖춰야 합니다. 그래서 유독 큰 선수들도 많았습니다. 김영현과 지금은 이종격투기 선수인 최홍만은 키가 217cm였습니다. 큰 키 덕분에 이들의 별명은 '골리앗' 또는 '인간 기중기'였지요.
둘 이전에 원조 '인간 기중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준희, 이봉걸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3이(李)시대'를 열었던 205cm 이봉걸이었습니다. 큰 키를 이용한 힘의 씨름으로 통산 승률 70.65%(225전 187승)를 기록했는데요. 이는 천하장사 10회에 빛나는 이만기에 이은 2위였습니다. 그만큼 키와 힘을 잘 활용하는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이봉걸의 경우 큰 키로 인한 잦은 부상으로 선수 생활이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25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90년 7월17일은 원조 '인간 기중기' 이봉걸이 민속씨름에 발을 들인 지 6년 만에 모래판을 떠난 날입니다.
1980년대 민속씨름은 그야말로 세 명의 이씨가 휘어잡았습니다. 동갑내기인 이준희와 이봉걸, 그리고 6살 어린 이만기가 이들의 경쟁에 가세했습니다. 이준희가 천하장사 3회, 이봉걸이 2회,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온 이만기가 은퇴할 때까지 총 10회나 천하장사 자리에 올랐습니다. 명절마다 전파를 탔던 민속씨름이었기에 셋이 붙기라도 하면 온 국민이 TV 앞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당시에는 광고도 찍을 정도로 스타였다. (광고 영상 캡처)
그런 상황에서 이봉걸이 은퇴식과 함께 샅바를 벗었습니다.
부상 때문이었습니다. 무릎이 205cm 큰 키를 버텨내지 못한 거죠. 오른쪽 무릎 인대 부상이 악화되면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미 수 차례 수술을 받았던 이봉걸이었기에 더 이상 샅바를 잡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사실 이봉걸은 남들보다 늦게 민속씨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고교 졸업 후 현대씨름단에 입단할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대농구팀에서 큰 키의 이봉걸을 농구 선수로 키우려고 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결국 이봉걸은 현대씨름단을 나왔고, 이후 충남대에 입학해 씨름을 계속 합니다. 하지만 충남대 역시 씨름부가 해체됐고, 갈 곳을 잃은 이봉걸은 1984년 말에야 럭키금성에 입단하게 됩니다.
이후 큰 키를 이용해 천하장사 2회, 백두장사 4회를 거머쥐었습니다. 승률 70.6%는 이만기에 이은 당시 통산 승률 2위였습니다. 이만기에게는 10승21패로 열세였지만, 이만기 킬러로 떠오르던 강호동에게는 4전 전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여러 방면에서 일했습니다. 우뢰매라는 어린이 영화에도 출연했고,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2009년 에너라이프 씨름단 창단과 함께 감독으로서 모래판에 돌아왔고, 지난해에는 허리 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민속씨름동우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