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색깔도 금메달이네' 김보름(가운데)이 12일 2017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매스스타트에서 우승한 뒤 2위 다카기 나나(왼쪽), 3위 헤더 버그스마와 시상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강릉=국제빙상연맹)
안방에서 '노 골드' 위기에 놓였던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에 금빛 보름달이 떴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앳된 얼굴의 김보름(24 · 강원도청)이 평창올림픽 리허설을 멋지게 마쳤다.
김보름은 12일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2017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매스스타트에서 짜릿한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막판 역주로 다카기 나나(일본)를 0.11초 차로 따돌리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60포인트를 얻은 김보름은 40포인트의 다카기에 앞서 우승을 확정했다.
이번 대회 한국 선수단의 유일한 금메달이다. 당초 우승이 유력한 '빙속 여제' 이상화(스포츠토토)는 여자 500m에서 은메달로 아쉽게 우승을 놓쳤고, 남자 장거리 간판 이승훈(대한항공)은 팀 추월 경기 중 부상을 당해 남자 매스스타트에 출전하지 못했다.
김보름이 없었다면 한국은 안방에서 남의 잔치만 볼 뻔했다. 무엇보다 내년 평창동계올림픽의 리허설로 열린 테스트 이벤트여서 개최국으로서 공을 많이 들인 대회였다.
빙판 등 경기장 시설 면에서는 합격점을 받았던 상황. 이상화를 제치고 우승한 고다이라 나오는 일본 신기록(37초13)을 세우는 등 다수의 선수들이 개인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고다이라는 "좋은 시설을 갖춘 밴쿠버 경기장과 비슷하고 빙질도 좋다"며 강릉 경기장을 칭찬했다. 얀 데이케마 ISU 회장도 "일정이 촉박했음에도 준비가 훌륭했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빙판은 합격' 네덜란드 선수들이 10일 ISU 스피드스케이팅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팀 추월 경기를 하는 모습.(강릉=평창 조직위)
금상첨화가 되려면 성적도 중요했다. 지난해 말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서 열린 열린 ISU 쇼트트랙 월드컵에서는 금메달 4개가 나오며 최강국의 위상을 떨쳤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최소 2개의 금메달을 기대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간판 스타 이상화와 이승훈의 금메달이 무산되면서 개최국의 자존심이 상할 처지에 놓였다.
이런 위기에서 김보름이 멋지게 금빛 질주를 펼친 것이다. 경기장을 찾은 팬들과 중계 시청자들도 이번 대회 시상식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를 들을 수 있었다.
새로운 스타 탄생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 빙속은 밴쿠버올림픽 금메달 3총사 이상화, 이승훈과 모태범(대한항공) 이후 이들을 받쳐줄 새 얼굴들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빙속 여제'의 위엄을 떨치는 이상화와 장거리에서 전략적으로 매스스타트에 집중한 이승훈 외에는 스타가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보름이 둥실 떠오른 것이다. 김보름은 그동안 장거리 종목에서 세계 정상권과 거리가 있었지만 2014년 소치올림픽 이후 신설된 매스스타트에서 최강자로 우뚝 섰다. 이승훈처럼 쇼트트랙에서 전향한 김보름은 몸싸움과 코너워크 등이 중요한 매스스타트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측면이 있었고, 이를 결과로 입증했다.
스타성도 갖췄다. 귀여운 외모의 김보름은 인터뷰에서도 톡톡 튀는 말솜씨를 뽐낸다. 이날 경기 뒤에도 김보름은 "(어제) 정월 대보름이 생일입니다"라면서 "그래서 이름도 김보름입니다"며 취재진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미역국은 못 먹었다"는 김보름은 "미끄러질까 봐 안 먹었느냐"는 질문에 "딱히 선수단 호텔에서 미역국이 안 나와서"라며 역시 웃음 바이러스를 전파했다.
'달덩이 미소' 김보름이 12일 ISU 스피드스케이팅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매스스타트에서 우승한 뒤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강릉=노컷뉴스)
매스스타트는 빙속 경기 중 유일하게 자기 레인 없이 경쟁하는 종목이다. 16바퀴(6400m)를 도는 동안 앞으로 나서려는 선수들의 몸싸움이 치열하다. 김보름은 "외국 선수들은 덩치가 커서 밀리기 쉽기 때문에 힘들다"면서 "예상치 못한 선수들까지 들어와서 오늘도 당황했다"고 말했다.
160cm 안팎의 작은 체구에도 정신력과 기술로 이겨낸다. 김보름은 "자리를 잡기가 힘들지만 나도 양보를 안 하고 계속 싸우다 보면 비켜주고 자리가 잡힌다"고 만만치 않은 독기를 과시했다. 이어 "쇼트트랙을 해서 코너워크가 좋은 게 무기"라고 강조했다.
다소 급하게 꺾여 있다는 강릉의 곡선 주로도 문제 없다. 김보름은 "잘 꺾지 못하는 선수들은 (곡선 주로가) 가파르다고 느낄 것"이라면서 "그러나 나는 원래 작은 원(쇼트트랙)을 많이 타서 한쪽으로 꺾는 게 쉽다. 강릉 코스는 나에게 잘 맞는다"고 웃었다.
중학교 시절 쇼트트랙으로 빙상에 입문한 김보름은 2010년 밴쿠버올림픽 당시 이승훈의 장거리 금메달을 보고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했다. 1년 만에 국가대표가 된 김보름은 소치올림픽에서는 장거리로 나섰으나 이후 매스스타트가 생기면서 자신에게 꼭 맞는 종목을 찾았다. 행운이 따르는 셈이다.
김보름은 상대적으로 뒤지는 체격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코너워크 등 자신에게 유리한 점을 집중 훈련으로 극대화하고 있다.(자료사진=대한빙상경기연맹)
이날도 실력과 함께 운이 따랐다. 이날 경기는 막판 일본과 네덜란드 선수가 엉켜 넘어지는 돌발 변수가 생겼다. 다행히 김보름은 이 소동에서 빗겨가면서 우승할 수 있었다. 김보름은 "걸릴 뻔했고, 같이 넘어지는 줄 알았다"면서 "조금만 바깥에 있었다면 넘어졌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돌아봤다.
그러나 운도 실력이었다. 전략적인 움직임이 좋았다. 김보름은 "코너를 돌면서 안쪽을 공략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래서 잘 피해갔고, 어느 정도 전략이 생각한 대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내년 평창올림픽을 앞둔 각오도 마찬가지다. 자만하지 않고 묵묵히 준비하면 결과는 따라온다는 것이다. 김보름은 "이날 우승으로 평창올림픽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냐"는 질문에 "이 종목은 워낙 변수가 많아서 자신감은 잘…"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어 "변수가 많은 만큼 잘 준비하는 것밖에 없다"면서 "노력하다 보면 하늘이 도와주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다. 달은 차면 기울고, 기울면 차게 마련. 김보름은 평창 밤 하늘에 뜰 만월을 향해 이제 막 차기 시작했다.